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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꾸꺼 Jun 20. 2020

오이 도망자가 오이 러버가 된 사연

음식 에세이

어렸을 때 오이 냄새만 맡아도 도망가는 사람이 나였다. 오이가 얹어진 짜장면, 피클이 들어간 햄버거, 오이가 들어간 김밥 등은 입에 넣지도 않았고 실수로 먹게 되면 퉤하고 뱉어버렸다. 그래서 어렸을 때 햄버거 가게에 가면  피클이 들어가지 않은 버거킹 치킨 버거만 먹었다. 엄마는 왜 그렇게 오이를 싫어하냐며 답답해하셨다.

그런데 오늘 난 오이가 듬뿍 들어간 피클을 담갔다. 무와 오이를 한입 크기로 또각또각 잔뜩 썰어 속이 깊은 큰 스텐레스 그릇에 넣은 후 식초와 자일로스 설탕, 물, 그리고 피클링 스파이스를 넣고 끓인 물을 부어 만들었다.


올해 들어 벌써 세 번째 피클을 담그는 것인데 내가 만든 피클은 짠맛이 없기 때문에 반찬으로 부담이 없고 새콤하고 개운해 치킨, 짜장면 같은 느끼한 음식과 참 잘 어울린다. 내 친구들도 내 피클을 좋아해 몇 번씩 가져다주기도 했다.

참 이상하다. 조금의 오이가 들어간 김밥도 안 먹었던 내가 오이를 잔뜩 넣은 피클을 만들고 있다니.


생각해보면 오이를 잘 먹게 된 건 서른이 막 넘었을 때였다. 정말 무더웠던 여름, 안 먹던 수박을 사 먹었는데 진짜 꿀맛이었다. 수박의 하얀색 부분 바로 전까지 이로 싹싹 베어 먹었고 신기하게 그때부터 점점 오이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수박의 비릿함이 오이와 비슷했나 보다. 생오이를 시작으로 오이소박이, 오이냉국 등도 먹었다. (피클은 초등학고 고학년 때 피자를 먹으면서 먹게 되었다)


이젠 오이가 듬뿍 들어간 월남쌈도 잘 먹고, 오이를 썰다가 남은 것을 입에 넣고 아삭아삭 씹어먹기도 한다.


참 신기하다. 아빠도 나처럼 어렸을 때 오이를 못 먹다가 커서 먹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런 것도 닮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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