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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영 Sep 06. 2023

선생님에게 권위는 생명이다

<프린들 주세요> 엔드루 클레먼츠 지음 / 사계절

며칠 전 서이초 선생님의 49재를 맞아 전국의 수많은 교사들이 여의도에 모였다. 20만 명이 넘는 교사가 추모 집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교사들은 더 이상 교사를 죽이지 말라며 절규했다. 서이초 선생님의 죽음으로 인해 비로소 인지하기 시작한 학교 사회의 이상 징후들이 생각보다 더 크고 깊어서 우려스럽다. 학부모는 선생님을 믿지 못한 채 내 자식만 옹호하고 학생은 자유 뒤의 더 큰 책임은 외면한 채 무한 자유만을 외친다. 어느 순간 권위로부터 멀어진 선생님은 오늘도 힘겹고 외로운 싸움을 하는 중이다. 


나는 교사들이 살기 위해 여의도에 모였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살기 위해서는 타자로서 권위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들은 단순한 직장인이 아니다. 단순한 노동자, 단순한 공무원도 아니다.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타자로서 권위가 담보되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권위가 실리지 않으면 그들은 살아도 산 게 아니다. 교사로서 그들의 역할이, 업무가 타자의 권위와 신뢰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권력이 아닌 권위! 말이다.


<프린들 주세요> 엔드루 클레먼츠 지음 / 사계절

엔드루 클레먼츠의 동화, <프린들 주세요>의 그레인저 선생님을 소개한다. 깐깐하고 융통성 없고 고리타분하기만 한 국어 선생님이 어떻게 한 아이의 욕망을 끌어내고 열정을 다해 추진하게 하고 결국은 성공으로 이끄는지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교사를, 학교가 교사를, 학생이 교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알 것 같기 때문이다. 학부모가, 학교가, 학생이 어떤 생각 아래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또한 깨달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닉은 늘 기발한 생각으로 수업시간에 시간 끌기 질문을 던져 친구들의 환호를 받곤 했다. 5학년 첫 국어시간, 그날도 닉의 질문은 멈추지 않았다. “선생님, 이 교실에는 사전이 참 많아요. 특히 저 큰 사전이요, 그 많은 낱말들은 다 어디에서 온 거예요?” 하지만 깐깐하기로 소문난 그레인저 선생님은 닉의 계획을 꿰뚫어 보고 스스로 답을 찾아 발표까지 하라고 시킨다.  낭패를 본 닉은 그래도 열심히 숙제를 하려 했지만 사전에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걸 발견한다. 


“그런데 선생님, 왜 이런 낱말은 이런 뜻이고 저런 낱말은 저런 뜻인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개라는 말이 꼬리를 흔들며 왈왈 짖는 동물을 뜻한다고 누가 정했나요?” 

“누가 그랬냐고? 네가 그런 거야 니콜라스. 우리 모두 그렇게 하자고 약속한 거야. <중략> 새 낱말을 만들어야 할 때도 있지만 사전에 있는 낱말들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사전에 올라온 거야.” 


그리고 모든 일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닉은 길에서 주운 볼펜을 ‘프린들’이라고 부르며 친구들과 함께 앞으로 영원히 펜 대신 프린들이란 말을 쓰겠다고 서약한다. 사전에 오른 단어가 '모두가 그렇게 하자고 약속한 것'이란 선생님의 말처럼 모두가 약속하면 하나의 신조어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인지 실험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닉의 실험에 선생님은 곧바로 제동을 걸었다. 펜 대신 프린들이란 말을 쓰다 발각되면 방과 후에 남아서 반성문을 써야 한다고 선언한 것! 하지만 금지는 아이들을 새 낱말에 더 열광하게 했고 어느덧 수업이 끝난 뒤 ‘독불장군 그레인저’와 함께 남는 것은 명예로운 일처럼 여겨졌다. 낱말 전쟁의 시작이었다.  

   

어느 날 그레인저 선생님은 닉을 불러 두툼한 흰 봉투를 내밀고는 봉투 뒷면에 닉의 이름과 현재 날짜를 적게 했다. 선생님은 사건이 모두 종결된 뒤에 편지를 보낼 거라면서 닉의 서명이, 선생님이 쓴 편지 내용을 바꾸지 않고 지금 있는 그대로 보낸다는 증거가 된다고 말했다. 닉은 이상했지만 선생님이 시키는 데로 서명했다.  이후로도 낱말 전쟁은 계속됐다. 선생님이 반대하면 할수록 프린들이란 단어를 쓰는 아이들이 점점 더 늘어났다. 방과 후에 남아 벌을 받는 아이들이 많아지면서 학부모의 항의가 거세지자 교육위원회와 교육감까지 나섰지만 소용없었다.      


닉과 그레인저 선생님의 강력한 대치 속에 진행된 낱말 전쟁은 결국 <웨스트필드 가제츠>라는 지방 신문에 실리면서 중고등학생들도 펜 대신 '프린들'을 심심찮게 쓰게 되었다. 닉은 온 마을 아이들의 영웅이 되었다.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CBS 저녁뉴스에서까지 다뤄지면서 '프린들'이란 말의 위력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제 프린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펜을 대치하는 새로운 낱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0년 뒤, 닉 앨런이 대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소포 하나를 받았다. 소포에는 최신 개정판 웹스터 대학 사전, 사전 표지에 붙어 있는 쪽지, 두툼한 흰 봉투, 이렇게 세 가지가 들어있었다. 그 봉투는 10년 전 닉이 사인한 바로 그 편지 봉투였다. 닉은 쪽지에 쓰인 대로 사전의 541쪽을 펴봤다. <프린들>이란 단어가 등재되어 있었다. 닉은 10년 전에 선생님이 써놓았던 편지를 조심스레 꺼내 읽었다.    

  

“난 이제 이것이야말로 교사로서 소망하고 꿈꿔온 기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총명한 학생들이 고리타분한 교실에서 생각을 받아들여 그것을 세상 속에서 실제로 실험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회인 거야. <중략>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내가 작은 역할을 맡아야 할 것 같구나. 그래서 악역을 선택했다. 근사한 이야기에는 반드시 악당이 등장하잖니?”               

결과적으로 그레인저 선생님이 악당 역할을 맡음으로써 닉의 실험은 성공할 수 있었다. 닉의 욕망을 부추겨서 엄청난 추동력을 가지도록 도와준 선생님의 공이 컸다. 요즘 같은 분위기에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어땠을까? 닉의 부모는 집으로 찾아온 교장선생님께 닉의 행동을 말리지 않겠다면서도 그레인저 선생님을 비난하지 않았다. 학교의 역할과 선생님의 권위는 존중하되 닉의 창의적 행동 또한 꺾지 않겠다고 선언한 부모 덕분에 프린들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할 수 있었다. 학교 측도 마찬가지였다. 그레인저 선생님의 강력한 금지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면서 선생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항의하는 학부모들을 달랬다.  


학생의 욕망을 끌어내기 위해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던 선생님, 타자로부터 온 지식을 바탕으로 그 너머를 바라보려 했던 창의적인 학생. 선생님을 신뢰하고 아이의 꿈을 꺽지 않았던 학부모와 학교가 존재하는 동화, <프린들 주세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이 선생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지금 여기의 교육 현장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다. 그 믿음을 바탕으로 선생님의 권위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에 가장 앞장서야 할 사람은 교사가 아니라 학부모다. 믿음과 권위가 무너진 학교에서 내 아이의 건강하고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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