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엄마는 자꾸 노련미라고 한다.
아직 회사를 다닐 때, 출근 준비를 마치고 현관에 서서 거울을 보는데 문득. 낯설었다. 내가 너무 길에 돌아다니는 어른 직장인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어른. 직장인. 맞기는 하는데. 거울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가, 다시 뒤로 물러서서 멀리서 한번 얼굴을 다시 보았다. 고등학생 때랑 비교해서 이목구비가 달라진 것도 아니고. 주름이 늘어난 것도 아닌데. 왜 나이가 들어 보일까. 왜 어른 같아 보일까. 왜 직장인 같아 보일까. 화장도 안 했는데.
노가 늙을 노자인 거 같아서 부정하려고 했는데, 사전을 찾아보니 썩 틀린 말은 아닌 듯싶다.
노ː련-미 (老鍊味)
[명사]
오랜 경험을 쌓아 익숙하고 능란한 데서 오는 느낌. 노장(老將)답게 그에게서는 ∼가 풍긴다.
(뉴에이스 국어사전)
고등학생 때랑 비교해서 이목구비가 달라진 것도 아니고.
주름이 늘어난 것도 아닌데.
나는 어려서부터 형편이 없는 편이었다. 둔하다고 해야 하나. 초등학교 이후로 발길을 끊은 교회에서 합창 연습을 한 적이 있다. 교회였으니 찬송가였겠지? 내 파트는 알토였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알토는 무조건 제일 낮은음이라고 생각했다. 알토에도 멜로디라는 게 존재하고 그 멜로디에 따라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건 중학교 가서나 알았으려나.
암튼 나는 알토는 그냥 원래 노래를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능한 낮게 부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의 한 음씩 낮춰서 하는 '안녕 클레오파트라 세상에서 제일가는 포테이토칩' 게임 한 두 바퀴 돌았을 때의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언니였을지 선생님이었을지 모를 합창 연습을 지도하던 분은 맨 앞에 앉아서 아저씨 목소리로 목을 긁고 있는 나를 붙잡고 계속 멜로디를 가르쳤다. 하지만 나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계속 단전 깊은 곳에서 끌어모은 소리를 목 두껍게 만들어가며 내뱉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형편이 없는 편이었다.
포기하셨다. 그날을 자주 되새겨서 그날만 장기기억에 있는 건지, 아니면 그날이 진짜 마지막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이후에 교회 합창 연습을 한 기억은 없다. 교회는 좀 더 몇 번 갔던 거 같긴 하다.
근거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항상 나만의 뚜렷한 기준이 있었다. 잘한다 혹은 제대로 한다 라는 것에 대한. 중요한 건 그게 전부 완전 엉터리 었다는 거지.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낮은음을 내기만 하면 알토로서 노래를 잘하는 거다. 라는 나만의 아주 뚜렷한 정답이 있기 때문에, 나는 그 어떤 다른 사람의 말도 듣지 않는 거다. 아무리 알토 멜로디를 알려주어도 나에겐 꼴뚜기 왕자의 우주 사투리로 들리기 때문에 결코 제대로 해낼 수 없다.
그런데 최근 시작한 클라이밍은 수업 들은지 세 번 만에 같이 수업 듣는 사람들로부터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뭘 좀 안단다. 근데 그게 뭔지 알겠다.
내가 뭘 좀 안단다. 근데 그게 뭔지 알겠다.
타고난 지윤정은 클라이밍을 시작도 하기 전에 내 마음대로 클라이밍이란 겁나 잘 메달려있는거다. 라는 식의 정답을 이미 정해놓고 시작했을 거다. 그니까 선생님이 뭐라 하던 못 알아듣고 하라는 대로는 죽어도 안 했을 거다. 선생님은 복장 터지고, 속 뒤집어지고, 미치고 팔짝 뛰는 거다. 파바박. 그러다 포기하셨겠지. 하지만 지금의 지윤정? 주름살 없이도 나이 들어 보인다.
첫 수업에서 선생님이 지도해주시는 내용을 열심히 듣고 따라 하려 했다. 하지만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었다. 어디를 밟으라는 건지 팔을 어떻게 손을 어떻게 하라는 건지. 다리는 뭐 어떻고 고개는 어떻고. 혼돈의 좌우지 장지지지였다. 다른 수강생들이 하는 걸 봐도 전혀 모르겠었다. 그러다 선생님이 쭉 시범을 보여주셨고, 아하! 싶었다. 선생님의 몸놀림은 유려했다.
선생님의 몸놀림은 유려했다.
그 이후로는 계속해서 잘하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클라이밍은 실제 벽에 매달려 있는 시간보다 바닥에 궁딩이 붙이고 앉아서 기다리는 시간이 더 많은 운동이다. 한 시간 운동하러 가면 실제로는 한 두번 하는데, 한번 하는데 십분 길어야 이십 분이다. 근데 그것만 해도 온몸이 후달린다. 그러면 내려와 앉아서 다시 힘 충전하는 동시에 내 순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다. 클라이밍은 또 한 벽에 두 명 이상 매달려있으면 위험하기 때문.
기다릴 때 뭘 하느냐. 그냥 뭐 핸드폰 해도 되고, 수다 떨어도 되고, 스트레칭해도 되고, 뭐 하고 싶은 거 하면 된다. 나는 잘하는 사람 관찰하기를 선택한 거다. 그리고 무(無)의 상태인 나에게 그 관찰의 결과를 덕지덕지 기워 붙였다. 덕분에 비록 누더기이기는 하나 얼추 흉내는 낼 수 있었나 보다. 이때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나를 무(無)의 상태로 만드는 게 이제는 된다는 거다. 타고난 지윤정은 그거 원래 못했다.
사실 난 뭐든 대충 잘하긴 한다.
근데 뭐하나 뚜렷하게 잘하는 건 없다.
다 끝나가니까 하는 말인데. 사실 난 뭐든 대충 잘하긴 한다. 앞에서는 형편이 없는 편이라 해놓고 뭔 말인가 싶겠지만. 암튼 그렇다. 근데 뭐하나 뚜렷하게 잘하는 건 없다. 얕고 넓게 잘하는 편이다. 이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