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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스인 Jan 13. 2023

임신 40주 2일만에 엄마가 되었습니다

2021. 1. 28 그리고 2. 2.

임신 40주 2일차에 유도분만을 잡았다. 아기가 좀처럼 내려오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이슬도 비치지 않아 과연 순조롭게 유도분만을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다. 자연분만의 장점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왕이면 자연분만으로 아이를 낳고 싶었다. 


그리고 1월 26일 유도분만일을 맞이했다. 유도분만 전이라 간단하게만 식사하고 오라고 하셔서 메뉴를 고민하다가 삶은 두부와 시금치된장국 콩밥 1/3그릇에 사과를 먹고 갔다. 출산가방 목록을 마지막으로 체크하고 오빠와 집을 나섰다. 


병원에 가니 코로나19 검사 확인을 했다. 3일 전에 검사 후 받은 ‘음성’ 확인 문자를 보여주고서 분만실에 입장했다. 그리고 첫 순서는 관장. 관장약을 항문에 넣으니 1분도 되지 않아 폭풍처럼 밀려왔다. 이런 게 관장이구나... 장청소를 제대로 하고 나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왼팔에 두꺼운 링겔 바늘을 꽂고 출산유도 촉진제를 맞았다. 그리고 자궁 안쪽에 물주머니 비슷한 걸 찼는데 자궁이 열리면 자연히 터진다고 했다. 


이후 수시로 태동&수축검사를 진행했다. 배가 살살 아파지기도 했으나 이걸 진통이라고 하기엔 내가 생각해도 무리가 있었다. 결국 오후 4시 30분까지 반복했지만 별다른 변화가 오지 않았다. 주치의 선생님은 수축제를 놓을 때는 아기의 움직임이 둔하고 수축제를 제거하니 그제서야 태동이 활발하다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셨다. 자궁에 단 물주머니도 그대로인걸 보니 자궁문도 열리지 않은 듯 했다. 초산의 경우 2~3일 정도 유도분만을 시도하기도 한다지만 내 경우는 자궁문이 거의 열리지 않아 다음날도 유도분만이 어려울 수 있다며 제왕절개를 추천한다고 하셨다. 


유도분만까지 왔을 때는 제왕절개를 전혀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제왕절개에 대해서는 거의 공부하지 않았는데... 그러나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유도분만으로 인해 아기가 스트레스 받는 상황이 걸어지는 게 싫었다. 나는 제왕절개를 하겠다고 말했다. 오빠가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하고 수술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오후 5시 나는 수술방에 들어갔고 허리를 최대한 새우처럼 둥글게 말아보라는 간호사선생님의 말에 최대한 구부렸다.   그리고 등에 두꺼운 바늘이 꽂혔다. 두세번 아니 세네번 꽂히는 듯했다. 무슨 관을 찾아서 꽂아야 해서 그렇단다. 수술대 위에 나는 무조건 항복 순한 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바늘이 꽂히자 뜨끈한 약이 하체에 퍼지는 듯했다. 하반신을 마취한단다. 그러면 상반신은!? 제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수술을 하게 되는 건가요? 라고 묻자 “재워드릴까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당연히 네!! 조금씩 몽롱해졌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깨어나니 오빠가 행복이 사진을 보여줬다. 아 이 아이가 내 뱃속에 10개월 동안 들어있었구나... 너무 놀라웠다. 우는 얼굴이 꼭 내 어릴 적 모습 같았다. 행복이는 태변을 조금 먹었다고 한다. 너무 걱정됐는데 다행히 별 문제 없다고 한다. 


아기를 낳고 바로 안아보는 캥거루케어를 해보고 싶었는데... 행복이아빠가 탯줄을 잘라주는 것도 보고 싶었는데... 이것들은 제왕절개의 식순엔 없었다. 하지만 그런건 너무나 소소한 것들이었다. 드디어 내가 행복이를 만났고 그건 너무나 큰 기쁨이라는 것! 이것이 가장 큰 사건이다. 




1월 26일 행복이 출산 후 일주일이 된 지금까지 참 많은 감정이 몰아쳤다. 이 모든 것을 정리해두고 싶었는데, 도저히 글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 4박 5일 병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토요일에 집에 돌아오니 멘붕 그 자체였다. 아가는 너무 귀여웠지만, 해야하는 게 너무 많았고 나는 아는 게 너무 없었다. 


제왕절개 수술 후 깨어보니 오빠가 옆에 있었다. 오빠는 행복이 사진이라며 퉁퉁 불은 아가 사진을 보여줬다. 정확히 내 아기였다. 두터운 눈두덩이 미간에 잔뜩 지푸린 인상, 뻔~한 콧구멍까지 영락 없이 내 아기였다. 사진으로나마 아기를 만날 수 있어서 감격스러웠다. 마취제를 얼마나 넣었을까. 깨어난 후엔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나의 상태를 걱정하는 이들에게 메세지를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이후 우리는 병실로 들어갔는데, 1인실이 꽉 차서 6인실로 안내를 받았다. 베드에서 베드로 이동하는데 엄청난 통증이 몰려왔다. 내 몸엔 링겔과 진통제, 소변줄이 주렁주렁 달려있어 모든 움직임이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보낸 병원에서의 첫날 밤. 옆 베드 보호자의 엄청난 코골이에 도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까 고민했으나, 이내 남편의 코골이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행히 이튿날 1인실에 자리가 났다. 이동은 휠체어로 하라고 했다. 네??? 전혀 움직일 수 없었는데, 휠체어밖에는 이동할 방법이 없단다. 오빠의 도움을 받아 이를 악물고 이동. 이후 평안을 찾았다. 수술 2일차에 아기 면회시간이 있었지만, 몸을 움질일 수 없었고 오빠가 찍어온 행복이 사진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3일차, 드디어 모유수유 시간이 돌아왔다. 코로나 때문인지 모자동실을 할 수 없어서 병원에서 아기를 만져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행복이를 안았다. 내 아기라니, 믿기지 않을만큼 작고 귀여웠다. 내 뱃속에서 움직이던 생명이 이러한 모습이었구나... 감동 그 자체였다. 


모유수유를 성공한 줄 알았다. 아기가 내 젖을 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아기가 내 젖을 문 것뿐 모유가 나온 게 아니었다. 그 다음날 모유시간에도 행복이는 내 젖을 물었지만, 모유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병원 내 모유수유 클리닉을 찾았다. 비용은 생각보다 비쌌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오전에 행복이가 분유 알레르기가 있어 일반 분유를 먹었을 때 혈변을 본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래서 특수분유를 먹어야 한단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 조그만 아기가 얼마나 아플까. 오빠에게 울면서 얼른 이마트에 가서 매일유업 HA분유를 사오라고 했다. 오빠는 한파에도 불구하고 맨발에 슬리퍼인 채로 마트를 향해 뛰어갔다. 마트는 아직 개장 전이었고 오빠는 달달달 떨면서 그 앞을 기다렸단다. 그리고 마트 문이 열자 마자 달렸고 분유를 들고 신생아실 앞으로 달려왔다. 그 시간이 15분이 채 되지 않았다. 처음엔 어떻게 신생아실에 이런 특수 분유 하나가 없을까 싶었지만, 모든 아이의 상황을 다 맞출 수 없고, 분유는 일단 개봉하면 유통기한이 짧아서 3주 내에 버려야 한단다. 다행히 행복이는 알레르기 분유를 먹은 이후엔 혈변을 보지 않았다. 


행복이의 이름을 짓기 위해 아버님이 찾은 철학관에서 행복이는 재물운과 명예운을 갖고 태어났다고 했다. 그런데 체력은 약한 편이라 체력을 보충할 수 있는 이름을 지어줘야 한단다. 그 말이 계속 거슬렸고, 알레르기분유 사건이 있자 괜히 그 말이 원망스러웠다. 이래서 나는 사주가 싫다. 신경쓰지 않으려 해도 신경쓰게 되는 그런...  


그래도 한파에 눈까지 내리는 열악한 날씨에 인천에서 인덕원까지 손주의 이름을 짓기 위해 달려오신 아버님과 어머님의 사랑에 가슴이 찡해졌다. 이런 마음으로 부모님이 우리를 키우셨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은 매 순간 계속 스쳐 눈물이 계속 났다. 그동안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부모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게 느껴져서 가슴이 아려왔다. 감사하다고 느끼면 그만일텐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지 모르겠다. 그동안은 내가 잘라서, 부모 손 안가게 씩씩해서 내가 잘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의 사랑과 헌신이 얼마나 컸는지 느껴졌다. 이래서 자식을 낳아야 부모 마음을 안다고 하는 걸까. 


부모님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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