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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준 Aug 22. 2022

우는, 행복한 땅콩들

(feat. 겨..경록 오빠, 고마웠어요 ^_^)


그날은 친구들과 대구 MBC 텔레콘서트라는 프로그램을 방청하러 간 날이었다. 신나게 공연을 본 뒤 방송국 로비에서 싸인도 받았다. 그런 뒤 대기실인지 화장실인지 어디론가 향하던 크라잉넛 오빠들. 악수도 싸인도 끝났건만 왜 우리는 또 오빠들을 계속 쫓아갔는지. 당시 그 네 명 중 가장 좋아했던 베이시스트 한경록 오빠를 향해 달려간 나.


 "오빠~~ 오빠 ~~ 너무 멋있어요! 짱이에요 짱!"


그리고 그때였다. 와장창창..!! 날카롭고 시끄러운 소리가 순간 조용한 로비를 가득채웠다. 정체는 내 가방에서 떨어진 철필통이 바닥에 떨어져 굴러가는 소리였다. 오빠 오빠! 하던 나는 너무 당황해 필통에서 굴러나와 나뒹구는 펜을 줍기 바빴다. 그때였다. 한경록 오빠가 걸어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 모습을 보자마자 바로 내게로 달려와 펜을 하나하나 함께 주워주었다. 음악도 멋진데 마음까지 이렇게 착하다니, 어린 중딩 소녀의 마음은 미안하고 고마워 어쩔 줄 몰랐고 그때 한번 더 오빠에게 반해버렸다.


그때였다. 경록오빠와 나는 펜을 주워담아 필통 뚜껑을 열었고 그 순간 한 몇 초 정도의 정적이 흘렀던 것 같다. 당시 일명 유승준 빠순이였던 나의 필통 안에는 유승준 사진으로 도배가 되어있었다. 승준마눌, WEST SIDE 어쩌고 저쩌고.. 온갖 문구들과 함께....  한 가수의 훈훈한 에피소드로 마무리되면서 참 좋았을텐데. 나라는 인간은 이야기를 그런 휴머니즘 장르로만 끝내지 않게 만들어버린다. 민망하고, 미안하고, 멋쩍고, 부끄럽고.. 몇 초 동안 온갖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던 것 같다. 유승준 팬이었지만 크라잉넛 공연을 보면서 너무 신나고 즐거웠던 것도 진심이었지만 그런 상황에서는 그런 게 아무 소용없게 느껴졌다. 나보다 더 당황했을 경록오라버니는 끝까지 매너있게 필통에 다 펜을 담아주고 떠났다.




나의 락사랑의 시작은 아마도 크라잉넛이었던 것 같다. 라디오헤드, 건즈앤로지스, 퀸, 콜드플레이.. 수많은 좋아하는 밴드들의 음악을 찾아듣고 좋아하게 됐지만, 시작은 크라잉넛이었다. 쉽고 단순한 멜로디와 가사, 그럼에도 여러 사람들의 심장을 뛰게 만들 줄 아는 밴드. 무엇보다 음악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꾸준함.


 며칠 전 그들이 유퀴즈에 출연을 했다. 먹고사는 것도 바쁘고 예전만큼 음악을 찾아듣지도 않아 참 오랜만에 티비에서 그들을 본 것 같았다. 얼굴엔 세월의 흔적이 보였지만 20년 전, 어린 사춘기 소녀 시절에 보았던 모습과 여전히 같은 게 있었다. 표정, 사십대가 훌쩍 넘은 그들이지만 여전히 개구장이같고, 어딘가 순수한 얼굴과 표정, 그건 그대로였다. 그런 표정으로, 내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세상 속에서 자라는 동안 이십년 삼십년 전처럼 똑같이 한자리에서 음악을 해오고 있었다. 내가 너무 좋아했던 한 오빠는 몇십년 째 한국에 못 오고 있고 또 다른 오빠들은 몇십년 째 꾸준하게 노래를 하고 연주를 한다.


큰 예능프로에까지 나올만큼 나이들수록 더 환영받고 빛나는 그들이지만 나는 열여섯 아무것도 아닌 나를 도와주던 그 모습을 그저 기억한다. 당황해하던, 한 관객이었을 뿐인 나를 지나치지 않고 도와주었던 그 마음 그대로 또 여전히 멋진 어른, 멋진 음악인으로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경록오빠, 그리고 '우는 땅콩오빠들'. 내가 사춘기 소녀에서 이삼십대 청춘을 지나 중년의 락 좋아하는 아줌마, 할머니가 되어있을 그때에도 여전히 즐겁게 음악하는 밴드로 남아주었음 좋겠다. 아마 그럴 것 같다.

행복하게 울부짖는 나의 땅콩오빠들은.


22.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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