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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비나이 <처연>

잊혀진 상상력의 심연

세상에는 상상력을 요구하는 음악들이 있다. 시각적, 서사적 상황과 동떨어져 오롯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음악들이 있다. 가사라는 형태로 깃든, 음성 언어로부터 조차 동떨어져 음악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획득하는 음악들이 있다. 현대적 대중음악이 탄생한 20세기 이후 그런 음악들은 때로는 간헐적으로, 때로는 집중적으로 등장하며 미학적 영역을 구축했고, 진보적 청자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왔다. 위대한 영화 감독들은 영상위에 자신의 상상력을 펼쳐 놓지만, 그런 위대한 음악가들은 인간의 오감중 청각을 앞에 놓고 다른 감각들을 따라오게 한다. 음악의 독자적 서사는 이렇게 완성된다. 2016년의 여름, 나는 그런 음반 한 장을 앞에 두고 있다. 잠비나이의 두번째 앨범 <은서(隱棲)>다. 


지난 몇 년간 잠비나이의 활약은 경이로웠다. 영국 글래스톤베리를 비롯한 다수의 유럽 페스티벌로 투어 일정을 짤 수 있는 첫 밴드였으며, 한국을 찾은 해외의 음악 관계자들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드는 밴드이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영국의 유명 인디 레이블인 벨라 유니언과 계약, <은서>를 내기에 이르렀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진가를 알아주는 팀인 것이다. 이유는 명확하다.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기타와 드럼이 만드는 록 사운드의 익숙함에 거문고와 해금이 빚어내는 낯섬이 더해진다. 국악계 일부에서는 그들을 퓨전 국악의 틀로 규정하기도 했지만 이는 결코 온당하지 않다. 클래식이나 팝을 국악기로 연주하는 기존 퓨젼 국악의 빈약한 상상력에 그들을 가둘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잠비나이의 음악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여기서 평론가는 당혹하게 된다. 장르란 철학에서 말하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와 같다. 어떤 음악적 경향이 등장했을 때 편의상, 혹은 구획을 짓기 위하여 평론가들은 새로운 장르명으로 이 경향을 칭한다. 즉, 장르란 사후 발생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잠비나이는 이 장르의 탑 위에 서있다. 그동안 거문고와 해금, 피리가 가본 적 없는 세계를 연주하고 거친 기타와 드럼은 그들이 받아안은 적 없던 소리와 합을 이룬다. 그리하여 이 동과 서의 만남, 혹은 경합은 관습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탈주하고 미끄러지며 융기하고 사멸한다. 그것이 잠비나이가 지향했고 제시한 세계다. 


<은서>에서 잠비나이의 세계관은 더욱 견고해진다. 1집 <차연>을 켜자마자 듣는 이를 압도했던 ‘소멸의 시간’과 마찬가지로 첫 곡 ‘Wardrobe’에서부터 그들은 거문고의 현과 기타의 줄을 맞부딪히며 서늘한 불꽃을 튀긴다. 지난 앨범까지 인간의 꼬리뼈처럼 남아있던 국악과 포스트 록의 개별적 색은 더욱 엷어졌다. 대신 그들은 래퍼 이그니토와의 협업으로 힙합 리듬 없는 힙합 ‘Abyss’를 만들어내고, ‘그대가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위하여’ 를 통해 국악 바깥의 국악을 제시한다. 어우러지기 힘든 소리들이 생생한 혼돈으로 타오르고, 시간에 경이의 힘을 불어넣는다. 각각의 곡들은 신(scene)없는 스코어가 되고, 이 스코어 8개는 모여 영화없는 사운드트랙이 된다. 


은서동물학이라는 유사학문이 있다. 네시, 설인 같은 미확인 생물을 탐구하는 분야다. 공식 확인되지 않은 작은 단서에 살을 붙여 ‘숨어있되 아직 발견되지 않은 동물’에 대한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의 상상이다. <은서>에 필요한 것도 마찬가지다. 화려한 안무나 영상에 일절 기대지 않고, 가사라는 도구로 이해를 구하지 않고 오직 음악의 신비로 우리를 밀어붙이는 이 앨범을 받아 안기 위해, 우리는 잊고 있던 상상력을 꺼내야 한다. 그 때 이 음악은 무의식과 등치되며 미술, 마임 등 다른 비언어적 장르들과 마찬가지의 고양감을 가져다 줄 것이다. 나는 이 앨범을 들으며 여러번 눈을 감곤 했다. 당신도 그럴 것이다. 


주간동아 '김작가의 음담악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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