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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조지 마이클

인생의 전환기, 그의 노래가 있었다

중1의 끝무렵이었던가. 중2의 시작이었던가. 아무튼 겨울이었다. 엄마가 선물을 해주셨다. 삼성 마이마이였다. 워크맨이 국내에서도 막 유행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있는 집 아이들은 워크맨을 가지고 다니기도 했는데 그건 정말 극소수였고 보통은 나처럼 마이마이나 아니면 엘지(당시는 금성) 아하였다. 


 그 전까지 집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기는 안방에 있는 아버지의 인켈 전축이 유일했다. 아버지가 트는 판과 라디오는 저녁까지만 작동했고, 밤의 음악이란 그래서 마이마이와 함께 시작된 것이다. 그것도 내 방 이불속, 혹은 책상이라는 가장 개인적이고 은밀한 시공간에서.


그렇게 이종환의 디스크쇼와 별이 빛나는 밤에를 접하기 시작했다. 이문세가 진행하던 당시의 별밤에선 일요일마다 별밤가족들이 보내온 신청곡 엽서를 토대로 인기 차트를 방송하곤 했다. 내가 처음 별밤을 듣기 시작할 무렵, 계속 1위를 하고 있던 노래가 바로 조지 마이클의 'Faith'다. 아버지에게 테이프를 사달라고 했다. 디스크쇼를 통해서 알게 된 글렌 메데이로스의 테이프도 같이 졸랐다. 아버지는 다음날 퇴근 하시면서 지구 레코드에서 나온 조지 마이클과 성음에서 나온 글렌 메데이로스를 사다 주셨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의지로 음반을 구입한 것이다. (내 돈으로 처음 산 건 몇달 뒤 부활의 2집이었다.) 그렇게 나는 음악의 세계에 한 걸음 발을 담그게 됐다.


동네 서점에서 음악 잡지를 샀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아마 <뮤직 시티>라는 제목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 잡지에는 빌보드 차트가 수록돼 있었는데 낯설고 낯선 음악 세계의 지도를 보는 기분으로 차트에 오른 이름을 하나 하나 살폈다. 그런데 이상한 노래가 있는게 아닌가. 조지 마이클의 '아이 원트 유어 섹스'. 내가 가진 테이프에는 없는 노랜데 왜 이 노래가 차트에 있지? 이유는 간단했다. 아직 한국의 심의가 서슬퍼렇던 시절, 국내 발매시에는 금지곡으로 묶여 빠졌던 거다. 중2였다. 2차 성징이 만개하고 남성 호르몬이 용천수처럼 솟아오르던 때였다. 그런 욕망 덩어리에게 이 노래의 제목은 무한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아직 청계천 빽판가게라는, 지하 문화를 모르던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토요일 오후마다 하던 WWF(지금의 WWE)를 보기 위해서 AFKN을 틀었다. 이 채널에서는 프로그램 사이마다 최신 팝 뮤직 비디오를 보여주곤 했는데 그 때 바로 '아이 원트 유어 섹스'를 보게 된 것이다. 도대체 난 무엇을 상상했던 걸까? 듣기만해도 그 날 밤 몽정을 해버릴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뮤직 비디오는 처음부터 끝까지 살색이 난무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처음에 제목이 뜨는 순간, 자세를 고쳐 잡고 방문을 잠궜던 나는 노래가 끝날 무렵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오늘 WWF에는 헐크 호건이 나올까 마초맨이 나올까를 더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 뒤로 한동안 조지 마이클을 잊고 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헤비 메탈을 알게 됐고, 팝 따위는 시시한 음악이라 여기는 허세의 사춘기 위에서 격랑의 나날을 보내게 됐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 마이클의 이후 행보는 우연히 밟게 되는 레고 조각처럼 강렬한 것이었다. 소속사와의 분쟁 때문에 공백을 가진 후 내놓은 <리슨 위드아웃 프리쥬디스> 광고를 봤을 때 나는 이 앨범을 살까 말까 고민했으며, 친구들과 함께 프레디 머큐리 추모 공연 비디오를 보고 난 후에는 "야, 역시 액슬 로즈가 짱이야"라고 호기롭게 말하면서도 '시발 조지 마이클 존나 멋있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라이브 비디오를 집에서 몇 번이고 돌려 봤다. 액슬 로즈 파트보다는 조지 마이클 파트를 더 많이 봤다.


오늘 조지 마이클의 급작스러운 부고를 접하면서 그 때의 일들이 기억의 창고에서 먼지를 털고 기어나왔다. 2016년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쓴 글은 20세기 영웅들의 부고였다. 레너드 코헨이 마지막일거라고 당연히 생각했다. 데이빗 보위가 자신의 별로 떠나가면서, 친구들을 너무나 많이 데려간 것 같다. 별들이 유성우처럼 한꺼번에 저무는 한 해였다. 지난 세기가 본격적으로 영면에 드는 한 해였다. 인생의 전환기, 라는 다중잠금잠치의 열쇠 중 하나였던 조지 마이클을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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