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빙어니언 Jun 09. 2022

이상형? 일상을 특'별'하게 보낼 줄 아는 놈이요.

밋밋한 일상에 기념일 한 꼬집

 올해 2월, 우리 엄마 아빠가 결혼기념일 30주년을 맞이했다. 두 분 모두 (그 시대에 비해) 늦은 나이에 결혼해 60대에 맞이한 결혼기념일이였다. 언제나 그렇듯 아빠에게 리마인드를 보내고 새롭게 준비하자고, 이번 결혼기념일은 특별하게 보내보자고 이야기해도 아빠의 기념일 보내는 방법은 정말 밋밋하기 그지없다. 딸들이 갖고오는 케이크, 엄마가 해주는 음식 또는 레스토랑 선정 등으로 끝난다. 아빠로선 100점이지만 남편으로선 0점인 것이다.


엄마는 아빠와 30년을 살아왔으니 30번의 결혼기념일과 생일들을 보냈는데 엄마의 삐침이 6월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물어봤다. 왜 이번에 그 섭섭한 감정이 더 크게 느껴지는지... 그리고 엄마와의 깊은 대화가 시작되었다.


'여자는 죽을 때까지 사랑받고 싶어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말 맞았다. 엄마는 이번 30주년을 기념해 현금 300만 원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리고 딸 둘이 방에서 할 일 하거나 잘 때 돈을 건내면서 30년 고생했다고 얘기하고, 애들 키우느라 고생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기념일날 저녁 식사를 마친 우리 아빠는 아홉시 쯤 일찍 방에 들어가 잠을 취했다. 엄마는 준비한 돈을 건낼 기회조차 없었다. 아직까지도 그 돈은 엄마에게 있다고 한다. "이제는 돈을 주고 싶은지도, 고생했다는 말을 듣고 싶은지도 모르겠다"고 엄마는 얘기했다.


30년이라는 시간을 아직 살아보지 않았지만 누가봐도 짧다고 할 수 없는 세월이다.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니 MBTI에 대문자 F가 들어가 있는 사람으로서 엄마의 섭섭한 마음이 온전히 느껴졌다.


아빠는 엄마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잘해주겠다고 계속해서 얘기한다. 코로나만 풀리면 여행 가자고. 엄마가 알려줬는데 5월쯤 아빠가 카톡으로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용" 이라고 새벽 다섯시 쯤에 보냈다고 한다.(엄마는 그때서야 처음으로 왜 사람들이 안읽씹하는지 알겠다고 했다.)

그러곤 엄마가 얘기한다. 아빠는 엄마가 다이아몬드 반지, 명품 백 등 큰 걸 바라는 줄 안다고... 엄마가 진정 원했던 것은 결혼기념일 당일날 단 둘이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 그리고 고생했다는 말 한 마디였는데 말이다.

아빠가 충분히 좋은 사람인 것도 알고 아직까지 일도 하시면서 가장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렇게  하고 들어가는 모습에 우울감이 었는지 감정이   올라온다고 한다. 특히 아빠는 '선물  주는 사람이 아니야.' 라고 셀프 포지셔닝을 해놓았으니 모든 사람이 맞춰야 한다는게 싫다고 한다. 일상은 이미 밋밋한데 이보다  슴슴하게 만들어 버리니 상실감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4월달엔 엄마와 아빠가 부부 동반으로 다른 부부와 골프를 치고 오셨다. 그런데 다른 부부 중 남편이 홀인원을 한 것이다! 그 부부는 기분이 너무 좋아 밥은 물론이고 엄마와 아빠에게 퍼터 골프채를 각각 사주고, 카톡 프로필 사진도 바꾸고, 와이프 분에게 명품 백 선물, 우리 부모님과 또다른 밥약속, 골프약속 잡는 등 그 순간을 제대로 즐겼다고 한다. 2주 후에 밥약속으로 만났는데 명품백 자랑과 함께 홀인원 얘기를 반복적으로 하면서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고 했다. 골프 친 지 20년만에 첫 홀인원이니 정말 기뻤을 것 같다.


엄마는 홀인원 부부에 대해 이야기 해주면서 제작년쯤 엄마도 홀인원을 했다고 말했다. 다만 우리 아빠는 "이야~ 운 좋다"라는 말 한 마디로 끝났다고 한다. 여전히 엄마는 명품백이 아니라 '뭐 갖고 싶은 거 있어?'라는 말을 듣고 조그마한 립스틱을 아빠가 사주거나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으며 일주일 정도 행복이라는 감정에 흠뻑 취하고 싶어했다. 똑같은 홀인원에 너무 다른 즐거움을 보고 나니 엄마는 자신의 30년을 뒤돌아 보았다. 참았던 30년. 섭섭한 감정에 싸우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참으면 알아주겠지 라는 세월이 야속했다.


엄마와의 대화가 끝나고 나는 일상을 특별히 보내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특별한 일상이 아닌, 일상을 특별하게 보내는 법. 기념일을 진심으로, 같이 축하하는게 시작이지 않을까? 어느 소중한 하루를 위해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예쁜 옷을 골라보고, 현금도 뽑아보고, 옛날 사진도 준비하고, 서프라이즈 케이크도 검색해보는 등 그 날을 기념하기 위해 준비하는 한 주 또는 한 달까지 특별해지는 것 같다.


달력에 기념일이라고 적는 일. 함께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기다리고, 그 기다림 속에 기대와 행복이라는 감정이 듬뿍 담겨있다. 30년 세월을 같이 지낸 우리 엄마 아빠를 보아도, 사귄지 3개월된 연인을 보아도 매일을 특별하게 보내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일상 속 조그마한 특별함은 충분히 가능할 것을 우리 모두 다 알고 있지 않나 싶다. 유치하다고, 어린 애들처럼 뭘 그런걸 챙기냐고, 이젠 안 챙긴다고 하지 말고 서로에게 마음을 담아 고생했어, 내 옆에 있어줘서 진심으로 고맙다고 이야기해주자. 어느 누군가는 그 힘으로 한 주, 한 달, 일 년을 살아가니까.


꽃과 술과 촛불이 있는

과수원으로 오세요

당신이 안 오시면

이 모든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와주기만 한다면

이 모든 것들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요


                                                                                                                                                                                                    

작가의 이전글 '찡찡'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