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빙어니언 Dec 26. 2022

조율로 배운 뜨거운 배려, 그리고 업보(karma)

베풀고 베품받는 그런 세상을 그리며

좋은 일이 일어날까 좋은 일을 한 적,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학창시절 복도에 떨어진 쓰레기를 주어 쓰레기통에 넣었거나, 성인이 되어서도 앞에 서있는 고등학생 버스 잔액이 부족하다는 기계의 외침에 버스비를 선뜻 결제해주거나, 하다못해 다음 사람을 위해 문을 열어주는 등 '배려' 말이다.


본능적으로 나오는 배려, 미소 지어지는 배려, 하루를 따뜻하게 만드는 배려, '언젠가 나에게 이러한 배려 또는 운이 돌아오겠지'라는 생각에서 나온 배려 등 배려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고, 온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느낀 가장 뜨거운 배려는 엄마로부터 배웠다.


시작은 피아노였다. 체르니를 졸업할 정도로 꽤 오랜 기간 피아노를 배웠지만 어느 날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젓가락 행진'밖에 연주할 수 없는 나를 보고 한심하게 느꼈다. 엄청난 재능은 아니지만 나름 절대음감(샵이나 플랫은 절대 모르고 '솔'을 눌렀을 때 '솔'을 아는 정도..)을 갖고 있고 악보도 빠르게 습득 가능할 것이라 생각해 피아노를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피아노 선생님도 집 근처로 구했고, 의지도 생겼고, 문제는 피아노다. 집에 피아노가 있었지만 정말 어린 시절에 이모네로부터 받은 피아노라 조율이 절실히 필요했다. 미를 쳤는데 거의 솔 사운드가 나오는 정도였으니.. 심각했다. 피아노 선생님으로부터 추천 받은 조율사에게 연락했고 오랜만에 무언가를 배운다고 신나있는 딸을 보고 엄마가 뿌듯했는지 선뜻 조율은 엄마가 알아서 해준다고 했다.

엄마는 오후 2-3시쯤 조율사를 집으로 불러 조율을 요청했고 조율사는 땀을 뻘뻘 흘리며 아주 열심히 피아노를 조율했다고 한다. 1시간 정도 조율하는데 갑자기 뿌지직 소리가 났다. 큰 소리에 놀랐던 엄마는 바로 내 방으로 와 확인했다. 조율사는 땀을 흘리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음향판에 금이 갔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피아노 구조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미를 치면 솔 사운드라도 나왔는데 음향판에 금이 가니 미를 쳐도, 솔을 쳐도, 도를 쳐도 아무런 소리가 안 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퇴근하고 돌아온 나는 건반을 아무리 쳐도 아무 소리 안 나는 피아노에 화가 났다. 엄마의 잘못은 아니지만 제일 편한 사람이자 조율사 설명을 전해준 사람이 엄마니 엄마에게 속상한 마음을 모두 표출했다. 조율사가 책임져야 하는거 아니냐고, 피아노에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면 저게 피아노냐고, 다른 피아노라도 사서 둬야하지 않겠냐고, 대학교 졸업하고 취업하고 취미로 배우는거라지만 피아노에 진심이라고, 아무리 오래된 피아노라도 몇 십 만원 짜리 피아노 음향판에 저런 스크래치가 가면 어떻게 할거냐고 울면서 얘기했다.


엄마는 '알아서 할게' 라는 답만 늘어 놓았고 내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울고 있는 딸래미를 향해 엄마는 한 마디 더했다.


내 딸이 열심히 일하는데 큰 실수 했을 때 나같은 사람 만나 잘 넘어갔으면 해


엄마의 마음 깊은 배려에 내 심장은 누가 뜨거운 커피를 흘린마냥 마음이 아팠다. 아니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감정이 바로 들었던 것 같다. 서럽게 운 모습을 보여줘 미안했고, 엄마의 어나더 레벨 배려에 감동받았고, 피아노를 배우고 싶으면 내가 조율까지 알아서 해야했을텐데 책임감 없는 나에 대한 미움도 동시에 느꼈던 것 같다.


피아노는 조율사 30만 원, 엄마 30만 원 더해 60만 원 정도의 중고 피아노로 구했다. 조율사를 만나보진 못했지만 엄마에게 감사함을 계속해서 표현했고 새로운 피아노에 조율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연락달라고 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깊고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배려는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받고 베푸는 것 같다. 교통사고가 났지만 사람이 안 다쳤다는 감사함에 넘어가는 배려, 지갑 또는 핸드폰을 주었다면 사례금 안 받고 바로 주인 찾아주는 배려, 택배 기사님에게 간식을 선사하는 배려 등 하루를 넘어 인생 레슨을 가르쳐주는 배려.. 우리 모두 베풀고 베품 받아야 하는 그런 고귀한 삶이니까.


크리스마스 이브날 엄마와 아빠에게 올해는 많이 울지도 않고 착한 일도 많이 했으니 산타가 올 것 같다고 얘기했다. 뭔가 아이패드를 줄 것 같다고 설렘 가득한 말을 하니 아빠는 '산타가 추워서 이 날씨에 올 수 있으려나' 라고 했고, 엄마는 '너 많이 울던데? 울어서 산타 안 올 듯' 이라고 했다.

귀여운 대화가 끝나고 크리스마스 아침, 돈 봉투가 머리 맡에 있었다. '엄빠 말 내년에 잘 들으라고 준다!'라고 쓰여 있었고 5만원이 들어있었다. 나는 엄마와 아빠로부터 뜨거운 배려를 받았는데 엄마 아빠는 어떤 뜨거운 배려를 받았을까 궁금해졌다. 뜨거운 배려를 받아야 베풀 수 있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고 나는 또 어떤 뜨거운 배려를 누구에게 할 수 있을까 내년이 기대된다.


2023년,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행복과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불행만이 함께하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이상형? 일상을 특'별'하게 보낼 줄 아는 놈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