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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정우 Aug 17. 2022

#1 1950년대 중국

한국전쟁으로 시작된 중국 공군

논란의 여지가 많으나 오늘날 J-20과 FC-31과 같은 5세대 스텔스 전투기를 공개하며 무시할 수 없는 공군력을 자랑하는 중국은 믿기 어렵겠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수적 우세만 가질 뿐 질적으로는 북한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대만과 일본은 중국보다 적은 수의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중국의 항공 전력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고 대내외적으로도 이들이 중국보다 더 강한 공군력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중국이 오늘날 어떻게 미국을 비롯하여 동북아시아에 군사적 위기감을 조성하게 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1950년 한반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1949년 10월 1일, 장제스와 오랜 내전 끝에 마오쩌둥은 중국 본토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음을 선포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11월부터 북한을 도와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에서 중국과 북한 그리고 소련의 입장은 사뭇 달랐지만 중국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소련으로부터 MiG-15 제트 전투기를 공급받았다. 그리고 이때 소련은 중국에게 단순히 전투기를 판매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관련 기술자들을 파견하였으며 자국으로 중국인들을 데려와 교육시키고 중국에 풍동 시설을 지어주는 등 중국 내 항공기 개발에 필요한 환경을 조성해주었다. 이처럼 건국 초기에만 해도 소련은 같은 공산국가였던 중국에게 우호적이었으며 중국에 대한 기술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중국은 건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항공기를 면허 생산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출 수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 군용 항공산업의 시초인 선양비행기연구소가 세워진다.


이후 중국은 소련으로부터 들여온 MiG-15UTI 훈련기를 단좌형인 J-2와 복좌형인 JJ-2, 두 형태로 면허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훈련 성격이 강한 기체였으며 엄밀하게 말하면 중국의 첫 제트 전투기라 보기 어렵다.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제작된 제트 전투기는 MiG-17F의 면허 생산형인 J-5라고 할 수 있다. J-5는 1956년 7월 6일, 초도비행에 성공한 뒤로 1957년부터 중국 인민해방공군(이하 중국 공군)에 인도되었으며 J-2와 마찬가지로 단좌형은 J-5, 복좌형은 JJ-5라고 불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58년에는 소련의 첫 초음속 전투기 MiG-19의 면허 생산권을 획득하여 J-6이라는 이름으로 양산하기 시작했다. 이밖에도 중국은 소련으로부터 폭격기도 들여왔다. 1952년부터 250대 가량의 Ilyushin Il-28 폭격기를 도입했고 1958년에는 오늘날에도 중국 공군이 운용하는 Tupolev Tu-16 폭격기 면허 생산권을 획득하여 노후한 Il-28 폭격기를 대체하였다. 심지어 적은 수량이었지만 과거 소련이 시베리아에 불시착한 미국의 B-29를 무단 복제하여 제작한 Tupolev Tu-4 Bull 폭격기도 중국에 들어왔다. 이때 중국은 Tu-4를 기반으로 단 한대뿐이었지만 원시적인 형태의 조기경보기 KJ-1까지 제작한 바 있다. 이처럼 초창기 중국 공군은 모두 소련으로부터 들여오거나 소련 군용기를 면허 생산하는 방식으로 공군력을 길러나갔다.


그렇다고 중국이 독자적인 개발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중국은 소련 전투기를 면허 생산하면서 내부적으로는 ‘흥촨 503’ 계획을 통해 자국 공군이 운용할 독자적인 고등 제트 훈련기를 개발하고자 했다. 앞서 보았듯 손쉽게 소련으로부터 최신예 기체를 들여올 수 있었던 중국이 굳이 항공기 독자 개발에 착수한 이유는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로 시작된 중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 차이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와 레닌 사상은 중국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웠다. 이미 1800년대부터 산업화를 거친 유럽은 도시 노동자의 수가 상당히 많았고 마르크스와 레닌은 모두 도시 노동자 편에서 노동자를 위한 나라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반대로 중국은 인구의 절대다수가 농사를 짓는 농민이었다. 그래서 마오쩌둥은 농민을 중심으로 삼는 중국만의 사회주의, 즉 중극 특색의 사회주의를 주창했다. 그는 노동자가 아닌 농업과 농민을 사회의 중심으로 삼고 농업을 발전시켜 국가를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후 마오쩌둥의 농업 기반 사회주의는 마오주의로 불리며 널리 퍼져나갔고 쿠바나 베트남 등 사회주의 혁명을 겪은 지 얼마 안 된 국가들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산업화를 이루지 못한 상황이었으므로 중국의 마오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점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중국의 사회주의는 소련의 사회주의와 똑같은 붉은색을 가지지만 엄연히 다른 결의 사회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건국 전부터 스탈린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온 중국의 마오쩌둥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을 보며 그를 수정주의자라고 비판했다. 게다가 한국전쟁에서 소련이 보여준 소극적인 자세와 자신들에게 다른 동맹국들보다 더 비싼 가격으로 무기들을 판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소련에 내심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반대로 소련은 중국을 교조주의자라 하며 중국의 팽창식 공산주의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무엇보다 소련은 중국을 자신과 동등한 위치의 공산국가라 생각하지 않고 여러 공산 진영의 위성 국가들 중 하나로 여겼다. 이런 이유 때문에 소련은 조금씩 중국에 대한 기술 지원을 줄여나가기 시작했으며 이에 중국 내부에서는 독자적인 항공기 개발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시작된 중국의 첫 독자적인 제트 훈련기 Shenyang JJ-1은 중국이 가지고 있던 MiG-15UTI를 참고하여 설계에 들어갔다. 그래서 JJ-1의 외형을 보면 후퇴익 대신 테이퍼익을, 기수 전방에 위치한 공기 흡입구 대신 동체 측면에 위치한 공기 흡입구만 제외하면 소련으로부터 받아온 MiG-15와 상당히 유사했다. 그럼에도 주익 형상과 공기 흡입구의 위치가 변경된 점에서 중국의 독자적인 설계가 녹아들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각에서는 중국이 한국전쟁 중 획득한 미국의 P-80 Shooting Star의 설계를 차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P-80은 JJ-1과 마찬가지로 익근에 공기흡입구를 가지고 있다.) 특이한 점으로는 전방의 학생 조종석 캐노피는 힌지(side-hinge)로 열리는 데 반해 후방의 교관석은 뒤로 밀어 열리는 방식(slide-back)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가장 흥미로운 점은 JJ-1에는 소련의 Klimov RD-500 엔진을 역설계하여 제작한 PF-1A 원심식 제트 엔진이 탑재된다는 점이다. 중국이 복제한 소련의 Klimove RD-500 엔진은 소련이 영국의 Rolls-Royce Derwent V 엔진을 무단으로 역설계하여 제작한 엔진이었는데 한마디로 영국의 제트 엔진 기술이 소련을 거쳐 중국으로까지 흘러 들어간 셈이었다.

International Resin Modellers.com
People's Republic of China Archival Photograph
Sharkit.com

하지만 Shenyang JJ-1의 개발은 중국이 ‘역설계를 통한 단좌 전투기의 국산화’로 목표를 낮추면서 개발이 중단되고 말았다. 이때 당에서 목표를 낮추고 독자적인 항공기 개발을 취소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기체의 완성도와 별개로 중국 인민해방 공군이 운용하고 있던 전투기 대부분이 아직 왕복 엔진 항공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종사 입장에서는 제트 훈련기가 개발된다고 한들 제트 훈련기로 훈련을 받은 뒤 왕복 엔진을 가진 전투기를 몰아야 하는 다소 웃픈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중국이 제작한 제트 엔진이었다. 공중도 아닌 지상 시운전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블레이드 균열이 발생하여 개발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 결국 중국의 첫 독자 개발 제트 훈련기 Shenyang JJ-1은 단 2대의 시제기만 제작된 채 개발이 중단되었고 훗날 1958년 7월 26일에 초도비행을 실시했다는 중국 측의 주장만 남아있을 뿐이다.

Avionslegendaires Shenyang JJ-1


그 사이 1950년 한국전쟁과 1956년부터 시작된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등으로 중국과 소련은 서로에게 점점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59년 10월, 마오쩌둥은 중국을 방문한 흐루쇼프와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소련과 진행 중이었던 여러 합작사업들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중소결렬’ 이후 중국에 파견되었던 많은 소련의 기술자들은 중국을 떠나 소련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중국의 항공산업은 더 큰 위기를 직면해야만 했다. 바로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이었다.


1950년대 중국은 내부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일단 나라가 세워진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점에서 무리하게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1951년 5월에는 전 세계가 한국전쟁에 정신 팔린 틈을 타 무력으로 티베트를 통합하였다. 동시에 1954년과 1958년 대만 해협 위기 등으로 바다 너머로는 대만으로 건너가 호시탐탐 본토를 노리는 장제스도 견제해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국을 뒤흔든 사건은 바로 ‘대약진 운동’이었다. 1958년에 마오쩌둥의 주도로 8년 혹은 10년 안에 미국이나 영국 등 서구 열강들을 따라잡겠다고 시작된 대약진 운동은 중국을 발전시키기는커녕 농업과 경공업을 퇴보시키며 중국 전체의 문화 및 경제적 수준을 20년 이상 퇴보시키고 말았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전투기 개발 사업이 원활하게 돌아갈 리 만무했고 중국의 항공산업은 소련의 지원이 끊긴 채 1960년대를 마주해야만 했다.




<참고내용01>

우리나라는 미국으로부터 전투기를 도입해왔으며 서방제 명명법을 따른다. 따라서 전투기는 Fighter의 앞글자를 따서 F로 시작한다. 중국은 서방제 명명법이 아닌 독자적인 명명법을 가진다. 그래서 JJ-1은 전투기(섬격)를 뜻하는 중국어 '섬'(殲, jian)의 J, 훈련기를 뜻하는 중국어 '교련기'(敎練機, jiaolianji)의 J, 이 두 글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참고로 간체자의 경우 워드에서 글자가 깨지는 현상이 발생하여 정확한 중국어는 아니지만 간체자 대신 번체자 사용하였습니다.)


<참고자료>

International Resin Modellers Association, Articles 6: Hong Zhuan-503/Shenyang JJ-1

avionslegendaires, Shenyang JJ-1

Wikipedia, Shenyang Aircraft Corporation

Wikipedia, Shenyang JJ-1

Wikipedia, Mikoyan-Gurevich MiG-15

Wikipedia, Shenyang J-5

Wikipedia, Klimov VK-1

네이버 블로그 쿵디담, 중국의 첫 국산 제트 훈련기 : 셴양 JJ-1

네이버 블로그 도위창, 중소국경분쟁

네이버 시사상식사전, 대약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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