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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연 Apr 17. 2023

궁합이 맞는 사람


대화에도 분명 궁합이 있다. 대화가 자꾸 엿가락 잘리듯이 뚝뚝 끊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야기의 끝이 다른 이야기로 꼬리에 꼬리를 물어 우리 어쩌다 이런 이야기까지 하게됐지? 하게 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이렇게 말 많은 사람이 아닌데, 내 물에 뭘 탄 건지 이야기를 술술 끄집어 내는 사람도 있다. 기꺼이 서로를 내보이고, 이야기 하나에 내 이야기를 포개어도 보는 대화들은 늘 시간 관계상 어쩔 수 없이 틀어막아야할 정도로 물 흐르듯 흘렀다.




친구 H와도 그랬다. 안 지는 몇 년 됐지만 인사 정도만 하는 사이였고, 같은 대학교지만 다른 과여서 교양 수업이 겹칠 때 같이 앉는 것 정도에서 더 가까워질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그러다 H도 나도 이수해야하는 학점을 모두 이수하고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 둘다 '그래도 이 정도면 밥 한끼는 먹어야되지 않나?' 싶은 묘한 의무감에 약속을 잡았고, 고맙게도 H가 내가 사는 동네로 와주었다.




약속 시간이 다가올 수록 조금 후회가 밀려왔다. 무슨 이야기하지. 발 벗고 나서서 상대방을 즐겁게 해 줄 의무도, 능력도 없지만 적어도 어색하진 않아야할텐데. 무슨 이야기를 꺼내면 좋을 지 머리를 굴리기도 했다. 편한 사이에서 이따금씩 찾아오는 정적은 대화의 일부처럼 자연스럽지만, 이런 자리에서 찾아오는 정적은 대재앙이다. 

망한 소개팅처럼 얼굴로는 애써 웃어보이며 속으로 '괜히 보자 했다' '오늘 식사로 가볍게 끝내고 또 보잔 얘긴 안해야지' 하는 마음은 사실 눈치만 있다면 그 자리에서 다 느껴진다. '너도 나보고 다시 보잔 소리 안하겠구나' 상대방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 느껴지면 그때부턴 불편해서 미쳐버린다. 

서로의 마음을 다 아는데 모른 척하기란 참 민망스럽다.




하얀 외관에 옅은 나무색 인테리어로 꾸민 한 예쁜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저녁 치고 이른 시간이라 우리가 첫 손님이었다. 오 주여 심지어 우리만 있다니. 다른 손님들의 대화 소리가 잔잔하게 깔려야 자연스럽게 그 소리를 타고 대화의 물꼬를 틀텐데 조용한 식당에서 우리만 보고 있는 식당 사장님까지 있다면 이 상황을 더 불편해질 것이 뻔하다. 

딸랑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속으론 이 어색한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야 좋을 지 전에 생각했던 대화 주제들을 다시 빠르게 복기했다.



고개를 엉거주춤 꺾어 메뉴판 한개를 나눠 보고 음식을 시켰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뭐하고 지냈는지 간단한 근황을 이야기하며, 이제서야 같이 첫 식사를 한다며 머쓱하게 웃었다. 

이야기하다보니 다행히 H는 나보다는 어색함이란 걸 덜 느끼는 친구 같았고(그래 보이려고 노력했던 것일수도) 나는 조금 안도했다. 음식도 맛있었고 정적도 거의 없었다. 소개팅으로 치자면 대화가 꽤 통하는 상대를 만난 셈이다. 그래서 꾸역꾸역 식사만 하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집으로 후다닥 도망가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카페로 갈지 간단한 술을 마실지 망설이다가 아무래도 밤이니 술 한잔이 더 좋을 것 같아 2차는 술집으로 정했다. 오늘은 왠지 하이볼이 마시고 싶다는 H의 말에 작지만 안으로는 깊숙한 한 이자카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H는 인턴을 하고 있었고 나는 공부를 하고 있었고, 둘다 꽤 오랜 기간 연애하고 있었다. 취업과 연애라는 가장 큰 두 가지 주제 외에도 소소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오갔다. 서로의 속 이야기를 하는 데에 거부감이 들지 않았고, 모르는 이야기가 나와도 그게 또 하나의 주제가 되어 할 이야기들이 대기표를 들고 뒤에 줄을 섰다. H가 핑 던지면 나는 퐁하고 받으며 대화는 핑퐁같았다. 

"아 좀 아쉬운데..한 잔씩 더 시킬래?" 웬걸, 사람이 더 빨리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주량이 맞는 것이고, H와 나는 엇비슷한 속도로 알딸딸한 기운이 올라왔다. 잔을 부딪히고 마실 때마다 한 사람은 기별도 안가듯이 아무렇지 않고 다른 한 사람은 동공이 풀린다면 그것 또한 대재앙이다. 멀쩡한 사람과 취한 사람의 대화는 대화의 템포가 맞지 않아 결국 높은 확률로 멀쩡한 사람이 수습하게 된다. 

주량까지 맞다니, 소개팅으로 치면 아주 성공적인 상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애프터를 예약해놓는 상대다.



한 잔씩 더 시켜 기분 좋게 비우고 마음까지 배부른 상태로 술집을 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다음에는 H의 동네에서 보자며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짧은 시간 안에 밀도있었던 우리의 대화와 한결 가까워진 것에 대하여. 친구란 언제 어디서 생길지 모르는구나. H는 비슷한 점만큼이나 다른 점도 많았다. 어떤 부분에선 정반대의 선에 서있는 사람 같기도 했다. 내가 지나치게 신경쓰는 것을 H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 '그럼 나도 신경쓰지 말까..?'하고 동화되어 기분 좋게 마음이 풀어지는 부분도 있었다. 서로 반대되는 것이 거북하지 않고 오히려 더 재밌고 흥미로웠다.






너무 비슷해서 친할 수 밖에 없는 사람과 너무 비슷해서 오히려 불편한 사람이 있다. 마찬가지로 반대되는 사람도 너무 달라 말이 안통하는 사람도 있는가하면 너무 달라서 만나고나면 내 세계가 한뼘 더 커진 느낌이라 더 좋은 사람도 있다. 

어떻게 규정하긴 어렵고, 언제까지나 사람마다 다른 문제라 역시 궁합이라는 것이 있구나 싶다.



또, 누군가와는 서글플 정도로 예고도 없이 멀어지고, 누군가와는 갑자기 나타나 어쩌다보니 얼렁뚱땅 친해지기도 한다. 꼭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이 아니어도, 사회에 나와서도 충분히 친구가 생길 수 있다. 어쩌면 각자가 더 정제된 상태에서 만나 친해지는 것이 오히려 더 수월할 수도 있다. 

연애를 많이 할 수록, 사람을 많이 만나볼 수록 본인의 성향과 원하는 상대방의 스타일을 더 구체화할 수 있듯이, 사춘기를 지나 여기저기서 성격이 깎여 어느 정도 다듬어진 상태로 만나기 때문에 나와 맞는 지의 여부를 더 빨리 캐치할 수도 있다. 꼭 어떤 시절을 함께 겪어야만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사실은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한 시절을 보냈지만 결국 멀어진 사이가 떠올라 슬프기도 하다.



인생에는 그런 시기가 있다. 머리가 나로 가득 차서 누굴 만나도 나의 고민을 주절 주절 늘어놓게 되는 때. 똑같은 레퍼토리로, 심지어 멋쩍은 웃음을 한번 뱉어주고 다시 진지한 이야기로 들어가는 타이밍까지 똑같은 이야기를 만나는 사람마다 하게 될 때면 나는 늘어진 카세트 테이프처럼 지쳤다. 

그럴 때 대화의 궁합이 맞는 친구들은 늘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주었다. 나 홀로 이야기에 고여있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나를 이끌어주었다. 그러다 보면 또 본인이 어떤 이야기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 때도 있는데 그럼 또 나는 그를 거기서 꺼내주었다. 서로 하나의 생각에만 머무르지 않도록 본인의 생각을, 경험담을 꺼내기도 했고 알게 모르게 상대방의 머리를 댕- 치는 멋진 한마디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다 정신차려보면 어느 새 우린 깔깔거리며 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궁합이란게, '케미'라는게 이런 걸까. 말을 억지로 쥐어 짜내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나도 할 말이 떠올라 얼른 바톤 넘겨받아 이어가고 "나도 이야기하다보니까 생각났는데" 하며 계속 넘기고 받는 관계. 

함께 한 세월을 이길 수 있는 건 없다고 믿어왔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오히려 그 세월에 발이 묶여 맞지 않는 톱니 바퀴를 어떻게든 끼워맞추려다가 고장나버릴 수도 있으니까.



만날 때마다 어렵고 도무지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면 오랜만에 봐도 또 대화에 푹 스며드는 사람이 있어, 인간관계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래서 굳이 정의내리지 않으려 한다. 그저 좋으면 좋은 거고, 어려우면 노력은 해보지만 노력으로도 되지 않는다면 포기하는 것이 속 편하다. 친구 사이에도 권태기라는 게 존재하기 마련이라 그 시기가 지나가길 조용히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안된다면? 괴로워하면서까지 이어가야할 인연은 없다.



지난 번에 H와 날이 풀리면 요즘 핫하다는 용리단길에서 보자며 헤어졌다. 조만간 황사니 미세먼지니 좀 사그러들면 볼 예정이다. 

너를 위한 헌정글을 썼단다. 어떨 땐 나보다도 더 시크한 면이 있는 H가 이 글을 읽는다면 "어 뭐야 감동이네" 한마디 툭 던지고 넘어갈 것 같다. 둘다 낯간지러운 건 못 참는 성격이니 이 글은 말하지 말고 조용히 묻어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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