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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연 May 16. 2023

달밤의 그네







오랜만에 놀이터 그네가 타고 싶었다. 낮에는 바글바글한 아이들 틈새바구니에서 다 큰 성인이 그네를 탄다는 건 너무 이목이 집중이 되는 일이라 밤 시간이 좋다. 낮의 놀이터가 아이들의 것이라면, 밤의 놀이터는 집 가기 전 잠시 혼자 있고 싶은 어른들이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사와 털썩 앉아있을 수 있는 공간이다. 

밤의 공기를 조용히 맡고 어둠에 잠시 가려져 있고 싶은 사람들을 아파트 앞 놀이터 구석진 곳에서 종종 실루엣으로 보곤 한다. 그럴 땐 괜히 낯선 이의 시간을 해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집에 들어가거나 서로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슬며시 숨죽이고 앉는다. 

물론 우수에 차 고독을 씹으려고 가는 곳만은 아니긴 하다. 괜히 어릴 적 생각이 나 그네에 엉덩이를 한번 붙여보고 싶을 때가 있다. 앞뒤로 왔다갔다 낙엽 마냥 휘적휘적 타다보면 피부에 닿는 바람이 좋기도 하고, 하루 종일 두발을 땅에 붙이고 꼿꼿하게 서있었으니 약간의 무중력 상태 비슷하게 있고 싶달까.





그런 마음으로 집 앞 놀이터를 갔는데 초등학생 저학년으로 보이는 꼬마 두명과 엄마가 있었다. 그네 자리 두개는 이미 꼬마들이 차지해 슬그머니 벤치에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순서를 기다리는 입장이지만 대놓고 부담스러운 눈빛을 쏘아댈 순 없어서 핸드폰을 보다가 힐끗, 다른 곳을 보다가 힐끗, 눈알만 들키지 않게 도르르 굴렸다. 

좀처럼 집에 갈 생각이 없는 두 꼬마의 모습을 보다보니 어쩜 저렇게 사람은 다를까, 생각했다. 나란히 달려있는 그네 위에서 한 아이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옆으로 뒤로, 그네 위에 앉았다가 섰다가, 매달렸다가 기댔다가, 저러다 줄이 끊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곡예를 하고 있었고, 다른 한 아이는 망부석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엄마는 가만히 못있는 꼬마의 엄마이신지, "언니 너무 얌전하다 너도 언니처럼 좀 가만히 있어봐!" 하며 그네 옆 봉에 걸터 앉아있었다. 줄 두개와 엉덩이 받침 한 개로 이루어진 그네를 어쩜 그리 다양하게 활용하는지, 1초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의 모습에 웃음을 꾹 참았다. 이미 아이들은 집에 갈 생각이 없어보여 그냥 마음을 내려놓고 관찰하기로 했다. 

합성해놓은 듯이 너무 다른 두 아이의 모습을 보다보니 처음에는 움직임이 많은 아이에게 자꾸 시선을 뺏겼다가, 가만히 있는 아이를 유심히 보게됐다. 손으로 줄을 잡은 채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 이따금씩 어른이 거는 말에 얌전히 대답을 하고 또 가만히 있는 모습. 그 나이 아이답지 않아 대견하면서도 어딘가 찡했다. 나의 어렸을 때와 괜히 겹쳐보여서 그랬을까.





어렸을 때부터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성격 때문에 밖에서 엄마 아빠를 난감하게 한 적이 없다. 바닥에 드러눕거나 시끄럽게 울거나 악을 쓴 적도 없다. 물론 집에서는 한 고집하는 만만치 않은 애라고는 들었지만, 밖에선 남이야 있든 말든 제멋대로 한 기억이 없다. 시끄럽다고 주의를 받기도 전에 미리 알아서 조용히 하고 있고, 가만히 있고,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더 웅크렸다. 내가 손해를 볼지언정 남에게 양보하는 것이 당연했다. 

나는 또래보다 성숙하다는 것에 무의식적인 우월감을 가지면서도, 마음 한 켠에서는 내가 갖지 못한 자유분방함을 갈망했다. 어렸을 땐 성격 차이라지만, 크면서 그렇게 자유로운 아이들은 더 멋지게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런 친구들은 대게 남들의 생각보단 본인의 생각에 귀기울일 줄 알아서, 누가 뭐래도 본인이 행복한 걸 밀고 나갈 줄 알았다. 본인을 잘 알아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걸 자기 입에 넣어줄 줄 아는 사람들이 더 성숙한 것 아닐까.




최근에 갔던 한 강연에서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나의 완벽한 하루 말해보기'를 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눈 감을 때까지 완벽하게 행복할 수 있는 하루의 일과를 말해야하는데, 내 차례가 올 때까지 도무지 생각이 안났다. "저는 너무 강박적인 계획형이라 사실 완벽하게 행복할 수 있는 일과를 짠다기보단 생각나는대로 바로 바로 실행하고 싶어요. 버스를 타다가도 창밖 풍경이 마음에 들면 그냥 내려버리고 그냥 '지금 어떤 게 하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해버리는 식으로요." 어찌저찌 대답은 했지만, 완벽한 하루라는 상상에 스스로를 맡겨도 헤엄칠 줄 모르는 나에게 놀랐었다. 이 정도면 로또가 당첨돼도 그 돈을 어떻게 써야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겠군. 

어떤 사람은 휴양지에서 하루를 시작해 본인이 평소에 좋아하는 스노쿨링을 하고, 물에 온전히 몸을 맡긴 채 둥실둥실 떠다니면서 물고기들이 살갗에 지나는 그 느낌을 만끽할 거라며, 또 저녁엔 맥주와 함께 오감을 자극하는 이국적인 음식을 먹을 거라고 했다. 또 누군가는 본인이 사실 스포츠댄스 취미가 있다고 수줍게 말하며 오전에 스포츠 댄스로 하루를 시작해서 개운하게 씻고 상상 속 본인이 사장인 카페에 가 좋아하는 원두로 드립 커피를 해먹고, 저녁에는 마른 안주와 술을 마시며 테라스에 앉아 마무리를 할 것이라고 했다.

대단치 않은 일이라도 그 짧은 시간에 본인이 좋아하는 것들을 쏙쏙 꺼내어와 보이는 그들이 신기했다. 본인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지 아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평소에도 본인들의 마음을 잘 살피고 귀기울여줬을 것이다. 남들의 무수한 말들과 시선 속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골라낼 줄 알 것이다. 28년을 나와 부대끼면서 살면서 가장 친해야할 내가, 이렇게나 나를 모른다.




놀이터에서 그네를 요란스럽게도 타는 꼬마를 보면서 '애는 저래야지' 생각하면서 마음은 자꾸 가만히 있는 아이에게 갔다. 내가 전자의 아이였다면 어땠을까, 상상도 했다. 혼나기는 많이 혼났을 것 같은데. 그래도 머리는 덜 아팠겠다.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은 남들이 없을 때도 스스로에게 자꾸 제동을 건다. 본인도 답답해 하지만 계속 '이러면 안돼, 저러면 안돼' 하며 되는 것보다 안되는 것의 목록이 점점 늘어난다. 남들이 아니라고 해도 나만큼은 'yes' 라고 외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할 수 있는 당당함은 또 어디서 나오나.

그저 내향적인 아이일 수도 있는데 괜히 내 모습과 계속 포개어보면서 생각이 멀리까지 날아갔다. 집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생각이 그 장면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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