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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연 Sep 19. 2023

엄마의 세상에 작은 창을 내어




9월에도 이렇게 비가 왔었나. 여름 소나기처럼 순식간에 뿌리고 가버리는 세찬 비가 며칠 연이어 왔다. 여름이 완벽하게 끝났다고 느끼는 순간, 이제 정말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도 체감될 것 같아 내심 여름의 끝자락을 붙잡고 마음이 오락가락했는데, 이만하면 됐다 싶다. 여름 대체 언제 끝나는거야. '비오는 날도 낭만이지' 하기엔 지겨운 비도, 몸에 달라붙는 꿉꿉한 습기도 얼른 물러갔으면 좋겠다. 




지난 주에는 아끼던 연차 하나를 썼다. 9월 중순이면 시원하겠지, 선선할 때 서촌 나들이 가면 진짜 좋겠다, 하며 8월부터 점 찍어둔 날이었다. 핸드폰 달력 어플에도, 다이어리에도 '연차'라고 정성스럽게 써뒀건만, 또 비다. 그래도 비가 많이는 안 올 것 같으니 나름 운치 있겠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날씨가 별로여도 연차는 연차인 걸. 행복한 연차!

회사가 있는 역을 지나쳐 경복궁역으로 향했다. 지금 시간이 몇시지, 지금 막 회사에서 점심 먹기 전 시간이네, 하면서 괜히 평소의 시간표와 자꾸 포개어보며 묘한 쾌감을 느꼈다. 역시 완전한 자유보다 약간의 제한에서 해방될 때가 더 짜릿하다.




평일의 서촌은 한적했고 뒷골목은 더 한산했다. 비에 먼지가 다 씻겨 내려간 건지 선명하게 보이는 인왕산도 멋졌다. 건물들이 대체로 높이가 다 낮아 걸리는 것 없이 시원하게 뚫려있는 하늘도 좋았다. 작은 우산 하나에 쏙 들어간 엄마랑 나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골목 사이를 걸었다.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최근 일을 시작하면서 엄마와 보내는 시간이 가장 많이 줄어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 시작 전에는 약속이 없는 날에는 엄마랑 삼시세끼 챙겨 먹고, 날씨가 좋은 것 같은 날에는 가볍게 동네 산책을 하고, 냉장고에 똑 떨어진 재료가 있으면 장바구니를 챙겨 같이 집 앞 시장을 가곤 했다. 엄마의 생활을 그대로인데 내가 그 옆에 착 붙었다가, 일을 하게 돼서 다시 떨어졌다가, 퇴사한다며 다시 붙었고, 지금은 또 다시 떨어져 있는 상태. 그렇게 생각하니 쉬는 날이 생기면 웬만하면 엄마와 보내려고 하는 편이다. 엄마가 과연 그걸 원할 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쉬는 날에 엄마를 끌고 밖으로 나가는 것, 혼자서는 가보지도, 알지도 못할 곳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오로지 집과 그 주변, 가족들의 뒷바라지에만 좁혀있는 엄마의 세상에 창 하나를 내어 그 너머의 것을 보여주는 일. 언제였던가 엄마를 데려갔던 곳들을 엄마가 집에 돌아와 아빠와 언니에게 신나게 이야기하는 걸 보고 그런 작은 다짐을 했던 것 같다. 엄마 여기 좋지, 요즘은 이런 게 유행해, 이런 것도 막상 먹어보니까 맛있지? 하면서 엄마의 세상을 조금씩, 잠깐씩 넓혀주자고. 





푼크툼이라는 작은 식당으로 들어가 가장 좋은 창가석에 앉았다. 묻지 않아도 평소의 엄마라면 당연히 좋아할 만한 다른 식당들도 충분히 있었지만, 왠지 이 날은 식당도 '서촌'스러운 곳을 가고 싶었다. 아담하고 조용한,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그런 곳. 메뉴를 주문하자 곧이어 작은 종지 그릇에 방울토마토와 치즈, 올리브 오일 비슷한 샐러드 소스를 뿌린 에피타이저가 하나씩 나왔다. "어머 참 맛있다. 아빠도 이런 걸로 아침 해주면 건강에 좋을텐데. 이런 소스 어디서 파나." "그러게 이런 소스면 샐러드도 맛있게 먹을텐데." 주문한 메뉴도 적당한 타이밍에 나왔다. "시금치 갈아서 카레 하니까 맛있네. 담백하고 너무 좋다." "엄마 요즘 시금치를 요리에 많이 넣어먹더라. 시금치 파스타도 있고. 생각보다 응용이 많이 되는 재료인가봐." 우리는 메뉴 한 개씩 시켰을 뿐인데 코스마냥 후식 요거트까지 나온다. "이런 귀여운 그릇은 또 어디서 나셨을까." "엄마 동묘나 신설동 풍물시장 가면 이런 빈티지 그릇이랑 차판 은근 많다? 탑쌓기한 것처럼 엄청 뭐가 많은데 그런 데에서 보물 찾기하는 것처럼 잘 찾아보면 득템 잘할 수 있어. 그리고 플레이팅을 예쁘게 하면 그냥 봤을 땐 별로인데 음식 올려놓으면 이쁠 때도 있더라구." 

그라운드 시소에서 하는 전시도 잠시 들렀다. 그림을 좋아하고 또 잘 그리기도 하는 엄마는 눈을 반짝이며 나보다도 더 천천히 구경했다. 대충 슥슥 그린듯 하면서도 세밀한 디테일로 몸의 움직임을 사실적으로 그린 게 놀라웠던 작가의 작품들. 엄마는 이런 사람들은 관찰력이 정말 대단한 것 같다며, 천재같다했다. "엄마도 잘 그려. 엄마도 심심할 때 그림 다시 그려봐." "에이 엄마는 따라 그리는 것만 좀 하지, 이런 건 잘 못해."




세상에 이렇게 새롭고 맛있는 게 있고, 이렇게 멋진 곳이 숨어있다는 걸 나는 아는데 엄마는 모를 때가 많다. 점점 나는 새로 알게 되는 것이 많아지고, 엄마는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진다. 그럴 때마다 잘 적어두고, 엄마에게 조금씩 보여주고 싶다. 엄마의 취향은 바뀌지 않을 것이고, 바꿀 필요도 없다. 그저 조금씩, 잠깐씩 새로운 것들을 보며 '이런 것도 있구나' 하면 충분하다. 엄마의 세상에 잠깐씩 문을 똑똑 하고 얼굴을 비추는 손님 정도로. 다음엔 또 어디로 가볼까. 그때도 엄마는 귀찮은듯 이끌려와서 막상 와보니 또 좋네, 아빠랑 언니한테도 말해줘야겠다,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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