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학비 낼 시점이라서...
누군가 "올해 몇 살이시죠?"라고 물어볼 때 머뭇거리는 것은 그냥 나이 밝히기 싫은(?) 점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주저하게 되는 이유는 갑자기, 불현듯 한국 나이 방식에 따른 내 나이를 듣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지구 중력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끼게 되는 것 같기 때문이고 당장 앞날에 벌어질 나의 인생의 또 한 시즌의 프리뷰 봤는데 그 시즌에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충격을 받기 때문이다. 먼 훗날 오늘날 이 기분과 감정을 돌이켜 볼봤을 때도, 20대 후반의 한 두 살 차이와 30대 중반의 한 두 살 차이의 무게와 부담감은 확실히 달랐다고 생각할 것 같다.
지금의 커리어를 사랑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서울의 자취를 시작하면서 매달 꽂히는 월급의 노예로 시작한 회사 생활은 점점 연차가 올라 갈수록 소소한 월급 인상에 스스로 족쇄를 채워 안주하게 되었다. 적당한 편안함의 연속이 이어지고 있던 것이었다. 남들 가는 해외여행도 일 년에 한두 번씩 가기 시작했고, 당시 국제연애 중이었으므로 점점 더 잦은 해외여행과 커지는 씀씀이의 연속적인 패턴을 나타내는 몇 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관심 영역의 발전과 수익창출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놓는 추가적 도움이 되는 행동 없이 여러 웹페이지 스크롤링만 해왔던 나날들의 연속이 이어졌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뜨니 내가 이제 서른 중반이 되어있었고 회사 가는 것을 한 번도 즐거워한 적이 없는 불평불만이 가득한 사람이 돼버렸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된 날이 왔다. 그냥 누군가가 '몇 살이시네요' 할 때 갑자기 내 나이를 듣는 순간 인지하게 된 것이다. 그 날 이후 밀려오는 현실 인지와 이렇게 까지 내가 나를 내버려 뒀다는 자괴감으로 괴로워하던 나날들이 이어지더니, 지금처럼 이렇게 살다 간 결국 이렇게 모을 수 있는 돈으로 집을 살수 잇는 것은 고사하고, 전셋값도 빠듯하며 앞으로도 뻔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지금이라도 뭔가를 하지 않으면 그냥 예측되는 삶이 돼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실제적인 행동으로 옮기는데 10년이 걸렸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24시간, 그 결과물은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따라 각자의 개인적인 결과물, 각자의 'history'가 되어 고스란히 남는다. 오늘날의 '나'를 지금보다는 더 발전시켜보자고 결심한 날이 바로 작년 3월이었다. "NOW OR NEVER." 내가 보낸 시간에 대한 결과가 항상 좌절스러운 것만은 아니고 그렇다 항상 성공도 아니지만 더 많은 시간을 활용할 수 있었더라면... 하는 후회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기록과 방향의 전환을 모색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학교 가는 것을 막연히 꿈꾸고 있었다면 그날 이후로는 지금 가지 않는다면 앞으로 돈은 더 모은들 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길까? 아니다 지금이 아니면 다음은 절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날부터 대학원 진학을 위한 자료수집과 학교 조사 그리고 행정상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한 가지 자신 있던 부분은, 싱가포르 소비자를 상대하던 업무를 수년간 했기 때문에 다행히 영어실력은 Okay. 영어 원어민 수준은 아니지만 상대방이 내 말을 잘 알아듣고 나도 내 말의 요점 설명이 가능한 정도였으므로 영어성적을 내는 것은 어렵지 않던 것 같다. 아이엘츠 성적용 공부 및 작문 연습을 온라인 강의로 시작했고, 응시료가 비쌌기 때문에 한 번에 점수 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지원 점수 턱거리로 딱 최저점에 맞춰 획득했지만 또다시 응시하지 않아도 되는 게 어디냐며 만족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로 했다.
레퍼런스를 위한 교수님 컨택 - 10년 동안 다른 분야 업무 종사 그리고 그 세월 동안 교수님 컨택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염치없이 '추천서를 써달라고 요청하면 써주시려나..' 거절될까 봐 두려웠다. 본인의 제자가, 외국에서 유학하겠다는데! 추천서를 안 써줄 리 없다는 온라인의 코멘트들이 있었고 교수 추천서는 필수였기 때문에 문의할 수밖에 없었지만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어쩌면 그 방법을 택했을지도 모를 만큼 그땐 그 두려움이 컸다. 나의 이력서와 성적표 그리고 앞으로 어떤 공부를 희망한다는 내용으로 교수님께 이메일을 보냈고, 교수님도 솔직하게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으나 그래도 어렴풋이 전달드린 나의 이력서와 학부생 성적을 바탕으로 정말 포괄적인 추천서를 써주셨다. 내가 메일 전달 드릴 때 어떤 분야 공부를 희망하고 나는 이런 학생으로서 교수님 수업을 잘 들었다는 내용도 추천서에 녹아주셨다. 그래서 정말 다행히도 직장상사와 교수, 이 두 개의 추천서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제 문제는 금전적인 부분이었다. 2020년도 5월 25일, 마침 그날 가족여행 중 토요일이었다. 아침에 메일을 열어보니 합격 축하 메일이 들어왔다. 기쁘다고 해야 하나 걱정되었나 오묘한 감정의 순간이었다. 그때 학비가 £25000, (올해는 가격이 올라 £25750) 내겐 딱 학비 정도의 여유만 있었기 때문에 여태까지 돈 못 모은 내가 한심하게 여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가야겠다고 느낀 것은 역시 "NOW OR NEVER". 학교를 가지 않으면 나의 인생은 여기서 발전 없이 끝이라는 느낌이 짙어졌기 때문에 돈은... 대출을 받아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영국의 COVID-19 상황에 대한 뉴스를 보니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1500의 디파짓을 낸 후 여름이니 곧 잠잠해진다는 뉴스가 나오겠지 했으나, 확진자 수치는 점점 더 심각해졌고 나아가 학교에서는 9월 개강 취소 및 2021년 1월 개강으로 미뤄지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사상 최초이지 않을까?!!) 그때는 남자친구 있었기 때문에 함께 상의하여 내년에 영국으로 같이 가기로 했다. 2021/22 adademic year 등록 희망한다는 Differal을 신청했다. D-14개월, 남은 나날 생활비를 모으고 영어실력을 기를 수 있는 시간이라고 스스로 위안했지만 "NOW OR NEVER"에서 NEVER로 끝나버릴까 조바심이 나던 시간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거의 모든 부수적인 소비행태를 많이 줄인 것 같다.
학교 입학을 연장한 것, 이것이 바로 2020년도에 가장 잘 한 결정이라고 생각된다. Differal을 신청하고 그 결과를 받자마자 9월부터 영국 코로나 상황은 점입가경이 되어 총리까지 코로나에 걸리면서, 말 그대로 나라 전체가 lockdown으로 돌입된 것이다. 그때 출국한 사람들은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한 유학생활을 이어갔다고 한다...
2021년 9월 입학생들에게 비자 수속을 밟으라는 메일이 날아왔다. 이제 돋을 내고 서류를 준비하라는 의미다. 이때부터 나의 불안감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학교를 가는 것은 변함이 없는데, 갑자기 나의 모든 돈을 다 여기에 올인하게 되고 내가 잘 따라갈 수 있을지, 남자 친구도 헤어진 마당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살아남고 거기서 취업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면서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돈은 여전히 모자랐지만 학업의 부담감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 퇴사를 진행했다. 퇴직금이 들어왔고, 그다음 달 월급 날짜인 25일에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서 갑자기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피부로 깨닫게 되는 여러 가지 우왕좌왕하던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같은 직종에 다시는 근무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나는 항상 식품 공부를 하고 싶었고 지금의 두려움은.. 음 금전적으로 탄탄하지 않은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최근의 이별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기회가 왔으니 그동안 벌어놓은 돈을 다 쏟아부어서라도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시간이 온 것이다. 이토록 두려웠던 적은 없었다. 나에게는 이제 새로운 만남과 장소 그리고 할 일이 주어진 것이다. 누구에게나 이런 기회가 오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이런 기회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이제 내가 할 것은 오늘 하루를 잘 알차게 써서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많이 아는 내가 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토록 두껍고 거대한 앞에 보이던 문이 조금 열려 드디어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고, 뒤의 문이 드디어 닫히고 있는 오늘의 순간. 지금이 아니면 다음은 없다. 지금 이 주어진 기회를 이용해서 내일 더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오늘을 잘 쓸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