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형신 Jan 01. 2023

삼각형의 한 꼭짓점에서 본 옆얼굴

김기정, 김옥정 2인전 《Behind You 100%》 리뷰 2022

김옥정 작가와 김기정 작가를 처음 만난 건 전시장이다. 오랜 친구인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은 손을 잡거나 등을 기댄 그림들과 닮았다. 한 사람이 손을 넘기면 다음 사람이 손동작을 받듯 그림은 그림들을 받는다. 그림들은 굴러 굴러서, 혼자일 때와는 다른 제 모양을 찾아서 간다.


하얗고 긴 공간에서 호기심을 이끄는 건 수직으로 놓인 작품들이다. 입구 쪽과 벽면을 따라 내려온 두 ‘그림 모음’은 옥정 작가가 그렸다. ‘그림 모음’에서 화판들은 브라켓으로 이어지며 지그재그 형태로 허리를 굽혔다 편다. 모양들은 화판의 정면을 넘어 옆면까지 이어진다. 때문에 그의 ‘그림 모음’을 감상할 때는 옆으로 뒤로 돌아가 뒷면을 확인하게 된다. 한편, 덩어리가 큰 물결 모양의 하늘색 기둥은 기정 작가의 작품이다. 이곳저곳에 세워진 기정의 기둥들 또한 자꾸 주위를 돌게 한다. 이들은 그치지 않고 머릿속에서도 맴돈다. 나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기둥들을 일단 ‘입체’라고 부르기로 했다.[i]


‘입체’는 긴 이야기가 될 터이기에 잠시 뒤로 넘긴다. 공간에는 수직적인 조형물뿐 아니라 ‘구멍’이 있다. 먼저 옥정 작가와 기정 작가의 화판이 중앙에서 “옥기의 삼각체”를 이루는데, 커다란 화판이 등을 맞대어 생긴 구멍은 공간을 가르는 숨구멍이다. 텐트의 입구처럼 생긴 이 구멍은 걸터앉을 만큼 넓고, 눕고 싶을 만큼 길다. 그러나 나머지 ‘구멍’들은 손을 넣을 수 있는 진짜는 아니다. ‘구멍’들은 다름이 아닌 시선을 끄는 그림들이다. 그중 옥정 작가의 〈쉴 곳〉에는 세모난 구멍이 그려져 있다. 〈쉴 곳〉의 화자는 누굴까. 동굴 안 어둠에서 밖을 보고 있을까. 밖에 있을까. 아니면 구멍 난 담요를 덮고 있을까. 몸이 없었을까. 숨었을까. 내밀었을까. 나는 그림 속 화자에 자신을 빗대 ‘구멍’ 주위를 기웃거린다. 아리송한 옥정의 〈쉴 곳〉은 분명 규정되기 이전의 무엇을 가리킨다. 반면 옆에 걸린 기정 작가의 〈carpet〉은 또렷하게 생겼다. 〈carpet〉에 난 구멍은 종이에 그린 구멍도, 종이를 뚫은 구멍도 아니다. 이는 작가가 화판을 종이로 덮다가 남긴 구멍이다. 그리고 〈carpet〉은 그림을 지탱하는 일에 관한 그림이기도 하다.


〈carpet〉에서 종이 ‘카펫(carpet)’은 구멍을 열어 화판의 나뭇결을 보이며 화판의 옆면까지도 감싼다. 부드러운 ‘카펫’은 장지를 비빈 후 여러 겹으로 붙인 것이다. 기정 작가는 때로 보풀을 더 많이 일으키려 도타운 초배지를 쓰고, 종이의 가장자리를 그림의 중요한 요소로 삼는다. 한편 그의 〈헤엄 #1, #2〉의 파란 물이 든 얇은 종이는 섬세한 붓질을 닮았다. 다른 방식이지만 〈carpet〉과 〈헤엄〉 모두 화판과 종이, 물감과 형상이 뒤섞인 어딘가에서 그림이 된다. 그림은 기정이 다잡으려는 마음처럼 평형을 이루어 간다. 반면 옥정 작가는 기정 작가와는 달리 종이를 그림의 바탕으로 사용한다. 때문에 옥정의 그림에서는 종이보다 물감의 성질이 느껴진다. 기정이 종이에 물감을 스며들게 한 일과 달리, 옥정은 물감을 차곡차곡 쌓는다. 아크릴 물감이었다면 광택 나는 얇은 막이 생겼겠지만, 아라비아고무액과 섞인 분채는 종이에 겹겹이 스미고 얹혀 특유의 깊이감을 낸다. 그리고 미디엄과 물의 양에 따라 자연스레 표면에는 물 맺힌 자국이 만들어진다.


김옥정 작가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감정에 신경이 쓰인다고 했다. 작가는 감정을 섣불리 규정하는 대신 작은 붓질을 겹쳐 도형을 단정하게 빚는다. 2021년 9월 4일 옥정은 길을 가다가 마주한 풍경에서 자신을 보았고, 1년이 흐른 후 〈쓰다듬는 나무-2021년 9월 4일〉을 그렸다. 〈쓰다듬는 나무〉에서 나무는 자신이 드리운 그림자를 쓰다듬으며 위로한다. 여기서 그림자는 나무와 동등한 존재로, 나무를 위한 보조적 요소나 구성을 위한 단순한 조형적 요소가 아니다. 옥정의 그림에서 도형은 구름처럼 태어나고 피어올라 화면을 돌아다닌다. 그는 움직이는 듯한 도형으로 저절로 생기고 사라지는 감정을 은유해 낸다.


이제 다시 수직적인 작품 앞에 섰다. 먼저 김기정 작가의 ‘입체’는 무엇이라 볼 수 있을까. 천장까지 뻗은 기정의 〈눈길-eyes #1〉은 조각가 브랑쿠시의 〈끝없는 기둥〉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기정의 ‘입체’는 좌대의 변형이 아니며, 스스로 서 있지 않고, 바닥으로부터 올라오지도 않았다. 작가는 〈눈길-eyes #1, #2, #3〉의 캡션에 ‘입체’를 지탱하는 재료를 쓰지 않았다. 때문에 ‘입체’들은 3D 프로그램으로 모델링된 사물들의 표피를 연상케 한다. 전시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존재하는 장지는 자신을 스스로 지탱하지 않는다. 기정에 따르면 장지를 받치는 보조재는 스티로폼인데, 스티로폼 블록은 가볍고 물결 형태라 무게 중심이 불안정해서 접착제 없이는 안정적으로 쌓을 수 없다. 게다가 〈눈길-eyes #1〉의 경우, 천장 높이를 맞추기 위해 아래에 고인 나뭇조각 때문에 바닥으로부터 일정 정도 떠 있는 듯 보인다. 이에 〈눈길-eyes #1〉에 부여된 환영성은 종이의 물성에 관한 작가의 태도와는 충돌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김기정 작가의 ‘입체’와 김옥정 작가의 ‘그림 모음’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장지에 덮여서 보이지는 않지만, 기정 작가에 따르면 블록의 뒷면은 화판의 뒷면처럼 사각의 틀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가 끝난 후 기정은 내게 블록들을 따로 분리해 벽에 붙여서 찍은 사진을 보냈다. 다시 말해, 기둥을 이루는 블록에는 앞뒷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입체’는 화판의 옆면 길이가 늘어난 그림일지도 모른다. 한편, 옥정 작가의 태도는 명확하다. 옥정은 ‘그림 모음’에서 화판의 옆면에까지 그림을 그려 화판의 정면에만 그림을 그린 ‘회화’와 차이를 두었다. 옥정에게 평면으로서의 그림과 사물로서의 그림은 구별된다. 

  

하면, ‘입체’와 ‘그림 모음’은 어디쯤 존재하는 걸까? 앞서 보았듯 두 사람은 전통적인 조각가와 구별되지만, 가벼운 재료를 쓰고 장면을 연출하는 동시대 작가들과 태도를 공유한다. 그렇지만 동일한 형상을 필요에 따라 평면 혹은 입체로 뽑아내려 하지는 않는다. 기정은 종이의 물성을 드러내고 자유롭게 조형하기 위해 평면을 벗어난 입체 작업을 한다. 옥정은 화판 여러 개를 잇고 뒷면을 보이지만 결국 이는 그림을 위함이다. 기정과 옥정은 그림의 구성 요소에 관심을 보이며, 그림의 형식을 여전히 잇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입체’와 ‘그림 모음’은 그림에 관한 두 사람의 시각이 반영된 실험작으로, 목적은 전시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장면들을 만드는 일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전시의 수직적인 조형물들은 이어지는 질문을 남긴다. 사후적으로 관측한바 ‘동양화’를 베이스로 작업을 시작한 ‘젊은’ 작가들은 2010년대 중후반 이래 평면을 넘은 실험을 전개해왔다.[ii] 그리고 이 같은 경향은 ‘조각’에 관해 증가해 온 주목과도 교차할지 모른다하면

, ‘동양화’ 베이스에서 작업을 시작한 김기정 작가와 김옥정 작가를 이들과 함께 바라볼 수 있을까기정과 옥정은 수형적 계보로 재구성이 가능한 데이터베이스로서의 과거-현재를 탐구할 수도 있을까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이 될까?


          

[i] 나는 이 글에서 ‘동양화’, ‘조각’과 같이 개념을 문제 삼는 단어와 옥정의 ‘그림 모음’, 기정의 ‘입체’, ‘구멍’과 같이 개인적으로 붙인 이름을 따옴표 표시했다.

[ii] 이소임은 일민미술관의 시각문화 비평 연구 프로젝트 IMA 크리틱스를 통해 발간한 「헤테로크로니의 시간으로 달리는 동시대 한국화」(2022)에서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의 열기가 식고 ‘동시대성’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 2000년대부터, 젊은 한국화 작가들은 … 조각, 설치, 미디어를 아우르기 시작했다. 한국화는 더 이상 2차원 평면에 머물지 않게 된 것이다.”라고 진단한다. 사례 연구가 필요하지만, 덧붙이면 나는 2000년대 이후 전개된 ‘동양화’, ‘한국화’ 베이스의 ‘젊은’ 작가들의 실험에도 분기점이 존재한다고 짐작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