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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신 Jan 01. 2023

‘한옥’에서 ‘보는’ ‘한국화’ ‘전시’란 무엇인가

《미화微花: 작은 꽃》(리뷰: 콘노 유키)

이 글은《미화微花: 작은 꽃》(작가: 황예랑 / 기획: 윤형신 / 2022. 9. 1 ~ 9. 25)에 관한 콘노 유키 님의 리뷰입니다.



리뷰: 콘노 유키 


‘전통(이라 함)’에 대하여


한국에서 길거리를 지나갈 때 유독 눈에 많이 들어오는 수식어는 ‘전통’이라는 단어다. 음식점 간판만 봐도 ‘전통’이라는 단어를 자주 듣는다. 누구나 인지하고 있겠지만, ‘전통’이라 불리는 것들은 지금 막 태어난 것 아닌, 오래전에 탄생했고 여전히 그렇다는 조건을 전제한다. 따라서 지금 ‘전통’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과거와 지속이 전제된다. 하지만 당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그 ‘전통’이란 언제부터 전통이었을까. 즉 ‘전통’이라 불리기 전에는 그  당시에 전통이라 불린 다른 전통이 있었는데 차별화되었는지, 더 나아가 그 지속 과정에 변질이 없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지금 불리는 ‘전통’이란 탄생 처음부터 어떤 변화도 거치지 않고 독자적인 위치를 현재까지 유지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전통’이라는 말이 탄생 처음부터 독자적인 위치를 가졌는지 생각해 보자. 수식어로서 다양한 단어에 사용되지만, 기성이나 기존이라는 말과 달리 ‘전통’이라는 단어는 이미 있었다는 사실에 존속과 유지의 성격을 더한 표현이다. 단순히 있었다는 데 머물지 않고, 전승된 사실과 앞으로도 그래야 할 사명 의식이 ‘전통’이라는 말에 담겨 있다. 그렇다고 ‘전통’이란 말은 고유한 성격만 유지하지 않는다. 신규 세력의 등장에 따라 전통이라는 말을 부여하게 되면서 한쪽에서는 ‘신’이라는 수식어가 붙고, 다른 한쪽에서는 ‘전통’이라는 말이 붙는 식으로 서로 차이를 강조한다. 요컨대 ‘전통’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일종의 개념적인 선 긋기의 결과, 말하자면 ‘전통’의 내부 분열의 표시로 작용한다. 각기 탄생한 시기가 다를 뿐만 아니라 혼용할/될 우려를 피하기 위해 그 사이에 엄연히 차이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리는 태도로서 ‘전통’은 비로소 ‘전통’이라고 ‘불린다’. 



전통과 파생된 전통: 전람회와 전시


전통적인 공간에서 열린 전시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지역 예술제, 특히 일본의 시골에서 관광 산업의 일환으로 열린 다다미방 전시를 떠올릴 수 있다. 일본의 전통적인 가옥에서 미술 작품을 보는 일은 우리가 한옥에서 보는 것과 같은 감각처럼 와 닿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막상 일본에서 전통 가옥이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이런 전시뿐만 아니라 ‘전통’이라는 말은 도처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에 한국어로 말하는 ‘전통’과 일본어로 말하는 ‘전통’의 쓰임새 차이가 있다. 한국어로 ‘전통’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전통적’이라는 수식어로써 사용된다. 요컨대 ‘전통이라는 어떤 성격’을 가리키는 말이다. 가리키는 대상 즉 수식되는 단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주변 변화 속 지속의 성격을 지닌다. 아마도 급속도로 발전하는 도시—메타버스 정책이 시행되는 곳에서 식민지 시대 건축물의 유산을 남기면서 대립하는 세력들이 시위를 여는—에서 탄생하지 않았을까. 이런 의미에서 개량한옥 또한 ‘전통’이며 과거의 자취를 지닌다. 


한때—특히 근대기에 국가 차원에서 시행된 <조선미술전람회>가 그렇듯—‘전람회’라는 말로 시작된 미술 작품의 대중적인 소개 방식은 ‘전시’라는 말로 바뀌었지만, 근본적인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볼 람(覧)자가 빠지게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전시를 ‘본다’. 뿐만 아니라 근대기의 전람회 문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전시를 통해서 어떤 교육적인 배움을 얻는다. 거기에 걸려 있는 작품은 대중을 향해 공적인 말을 하는—제도에 승인된-규범으로서, 그리고 제도적인 뒷받침을 통해 향유되어야 할 대상으로서—선보여진다. 그런데도 차이가 있다면 단순히 보기/보여지기 위한 것보다 만드는 것, 즉 기획이나 큐레이팅이 들어간 결과를 보이게 되었다. ‘전람회’가 걸어가면서 한꺼번에 많은 작품을 보는 볼거리 형태와 달리, 구석구석에 기획 의도, 작가 노트, 서문, 기록 자료를 한데 아우른 결과로써 제시되는 것이 전시라 할 수 있다. ‘전람회’라는 말에 들어간 ‘회(會)’, 즉 사람들의 어떤 모임은 이제 ‘전시회’라는 단어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 말은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결과나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만든 것과 선을 긋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전람회’나 ‘전시회’와 다른, 보다 자율적인 뉘앙스가 ‘전시’라는 말에 반영되어 있다—그러면서도 그 자율성은 근대기의 제도적인 작동 방식을 탈취하여 그 방식을 보여주는 결과로서 제시된다. 


이번 ‘전시’ 또한 그런 기획성을 가지고 기획된 점에서 한 작가의 ‘개인전’이지만 ‘전시’의 성격을 ‘전람회’의 역사와 교묘하게 호응시킨다. 그것은 순응적인 방조의 시점과 다른, 그 안에 개입된 시점을 해체하기 위해 재차 개입한 것이다. ‘개량한옥에서 열린 한국화 작가 전시’는 어떤 위치를 점할까. 전통한옥에서 열린 서양화가 전람회와 달리, 꽤나 자연스러운 조합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한국화’라는 정체성은 ‘동양화’ 다음에, ‘개량한옥’은 ‘전통한옥’ 다음에, 나아가 ‘전시’는 ‘전람회’ 다음에 등장한 것처럼, 그전의 틀에서 벗어나면서 동시에 그 안에 머무는 태도가 보이기 때문이다. ‘개량한옥’은 ‘전통한옥’과 다른, 그러나 한옥의 다른 형태일 뿐, ‘한국화’는 ‘동양화’의 소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되, 우리만의 특정성을 모색했고, ‘전시’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 거기에 교육적인 요소—역사나 사회상을 연구하거나 반영한—를 가미한다. 말하자면 개념적으로 더해진 형식이 이번 전시의 골조를 이룬다. 하지만 그 결과는 앞서 말한 “자연스러운 조합”에 수렴되지 않는 태도로 선보여진다. 오히려 전통/개량된 것이나 동양화/한국화, 그리고 전람회/전시라는 말에 각각 정당화된 특성에 질문을 던지는 기회를 마련한다. 그것은 어떤 위치를 점하느냐는 물음 대신 어떤 위치와 어떤 위치 사이에 놓여 있느냐는 물음으로서 재차 제시된다.



전통과 파생된 전통: 동양화와 한국화


사실 한옥에서 미술 전시를 본다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다. 한때 시청각, 지금의 BGA갤러리처럼 현대미술/동시대 미술이 소개되는 전시 공간 중에 개량한옥이 몇몇 있다. 전시 공간뿐만 아니라 이제 개량한옥은 개량된 개량한옥으로, 말하자면 주거와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개량된다. 카페, 음식점, 기타 등등, 외관이나 실내 공간의 일부만 남기고 현대화하고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요즘, 개량한 개량한옥을 보는 기회가 더 많다. 사실 우리는 이런 파생물을 통해서 전통을 감각한다. 이러한 감각 방식은 전통이 왜곡된 상태로 인지되어 좋지 않다거나, 전통은 이제 다양하게 해석된다는 주장도 아니다. 대신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전통’이란 유지되는 것과 유지되기 어려운 것 사이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감각 방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화이트큐브가 된 전시 공간은 덧칠해진 과거와 기입될 미래를 동시에 담는다—과거의 자취와 앞으로 전개될 분수령으로서 벽이 세워진다. 이 벽은 과거와 미래의 흐름을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세워놓음으로써 과거와 미래의 분기점을 만드는 지금이다. 


이런 공간, 정확히 말하면 ‘(전시) 공간’에서 소개된 한국화 작품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한때 주거 공간으로 사용된 집에 들어가서 보는 전시. 그것은 대중에게 널리 보여주는 것과 다른 방식을 취한다. 그곳에 있던 가구 사이, 벽에서 떨어져서 보여주는 설치, 큰 것보다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작품은 ‘전람회’와 다른 구성이다. 개량한 한옥을 보고 그렇듯이, 우리는 동시대 한국화를 보고 ‘한국화’를 인식한다. 그런데 개량한옥이 종종 받는 비판처럼, ‘전통’에 어긋나는—기존의 ‘한국화’가 아니라는 식으로—것으로 종종 비판받는다. 하지만 ‘전통’,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통이라 함’은 ‘전통이라 할 수 없음’과 동시에 태어난다. 적어도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다루는 분야는 한국화가 맞다. 그런데 독립 이후, 그리고 80년대에 들어서 고조된 ‘대한민국’이라는 정체성을 고취하는 데 동원된 개념과 거리를 둔다. 모두에게 규범적으로/규범으로서 소개되던 공모전-전람회 형식뿐만 아니라 국가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 그 결과 전시는 ‘전시’라는 형식으로서 분수령에 대한 질문을 끌어낸다—우리는 비로소 ‘파생된’ 전통을 통해서 전통과 그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분간하기 시작한다. 이때 파생된 전통은 ‘전통’에 뒤떨어지거나 ‘전통’에 어긋난 것이 아니다. ‘전통’과 ‘파생된’ 전통은 오히려 같은 지평에 서 있는 개념이다. 그전에 있던 것과 다르고 이질적으로 ‘보이기’ 시작할 때, ‘전통’과 ‘파생된’ 전통은 동시에 탄생한다. 



이질적으로 보인다는 것—그냥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에서


여기서 ‘이질적으로’ ‘보인다’라는 것은, 전람회 형식처럼 거기서 있는 그대로 ‘보인다는 것’과 전시 형식에서 기획자가 의도한 바를 ‘본다는 것’을 접속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림과 오브제 작업은 소품처럼 가구와 함께 놓인 작품은 작금의 아트 페어나 아트 마켓을 비롯하여 상업적 거래가 이루어지는 팝업 스토어를 떠올리게 한다. 한때 규범을 예시적으로 보여주고 발설하던 자리는 무엇이든지 상품이 되는 경제 활동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의도보다는 가격을 통해서 가치가 가시화되어 더 공정한 잣대를 제공되지만, 숨은 의도의 공공연함과 상품처럼 진열된 모습은 있는 그대로 본다는 상태에 조건 지어진다. 그렇게 보이기만 하거나 그냥 보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질적으로 보이기 시작한 감각을 통해서 전통이라 불리는/부를 수 없음의 분수령에 눈을 돌리게 된다. 과연 지금 ‘한옥’에서 ‘보는’ ‘한국화’ ‘전시’란 무엇인가. ‘전람회’ 형식 대신 예술가 개인의 작업을 중심으로 구성하여 벽에서 떨어져서 보여주는 방식, 그것은 이곳이 가진 공간적인 제약—보존과 물질적인 여건 때문에 못을 박기 어렵다거나—뿐만 아니라 시간적 제약—즉 개념화되어 정립되어 온 시간 및 역사의 퇴적 위에 우리가 설 수밖에 없는 조건(지어져 있음)을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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