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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신 Feb 04. 2023

《우묵한 깊이 Overthrust》

      권세진 개인전 서문

하나. 2023년 - 깊은 공간과 우그러진 공간에 관하여


권세진은 2016년 작업 노트에서 “사진 속 형상(形象)보다는 사진 그 자체”를 그린다고 했다. 그랬기 때문일까. 당시의 그림들은 사진 속 공간을 열기 보다는 사진의 표면을 옮긴 듯 했다. 오래된 앨범의 사진과 그것을 그린 그림에는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었고, 흑백 대비가 강조된 야경은 잠입이 어려웠다. 여기에 더해 그리드에 따라 그리는 방식은 캔버스를 평면적으로 보이게 했다. 작가의 그림은 얇지만 침투가 불가능한 막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 중에서도 깊이감이 엿보이는 그림이 있다. 2022년 작 〈웅덩이〉는 사진의 표면 뿐 아니라 그 안의 공간을 보여준다. 전과 달리 공간이 우묵하게 보이는 이유는 깊숙이 아래를 보는 시선과 섬세한 담묵으로 그린 음영 때문이다. 〈테이블 : 이동시점〉(2022)도 마찬가지로 평평한 테이블 주변의 공간이 보인다. 사진들은 테이블과 거의 수평으로 찍혔지만 약간씩 어긋나는데, 그림 하단에 작가의 다리가 다중으로 겹친다. 최근작인 〈이동시점〉(2023)은 사진 9장을 합성하여 그린 풍경으로, 오류처럼 공백이 남아있다.  


사진 혹은 그림의 표면을 향하던 작가의 시선이 바뀐 이유는 한 장의 사진에 담기 어려운 거대한 풍경을 마주하고 나서다. 작가는 눈을 돌리거나 고개를 움직여야 파악이 가능한 공간을 촬영해 〈이동시점〉(2023)의 화면을 구성했다. 작가의 구성은 데이비드 호크니의 사진 콜라주를 닮아 있고, 장소를 종합하여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동아시아의 전통 회화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동시점〉에서 드러나듯, 하나의 폭포가 두 개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관념적이지는 않다. 작가에게는 대상이 무엇인가 보다 대상의 형상과 화면의 구성이 중요하다. 그가 우묵한 공간을 우그러뜨려 재구성한 풍경은 산을 다시 펼쳐서 상상하게 한다.




둘. 두 가지로 지은 이름에 관하여


둘의 하나. 《우묵한 깊이》는 비문이다. ‘우묵한’은 땅이나 바위와 같이 매스나 볼륨이 있는 명사를 수식한다. 그렇기에 ‘우묵한’은 ‘깊이’를 꾸밀 수 없다. 그럼에도 얼핏 ‘우묵한’과 ‘깊이’는 어색하지 않다. 작가의 신작에 드러난 공간감도 그렇다. 우묵할 수 없는 것의 우묵함과 접힐 수 없는 것의 접힘. 깊이 보지 않으면 지나치는 오류. 연결되지 않는 단어가 자아내는 희미한 긴장 사이에 그의 그림이 있다. 


둘의 둘. Overthrust는 미는 힘에 의해 발생한 단층(斷層) 중에서 끊어진 면의 경사가 45도보다 완만한 역단층이다. 한국어로는 발음 그대로 ‘오버스러스트’나 ‘충상단층(衝上斷層)’이라 번역한다. 4인조 데스메탈밴드의 이름이기도 하다. 조용한 그림에 비해 튀는 제목을 데려온 이유는 어감보다는 땅의 모양이 좋았기 때문이다. 쌓이고 미끄러져 끊어진 단층은 여러 장의 사진으로 구성된 산세와 시공간이 어긋난 그림을 은유한다. 




셋. 흘러가거나 쌓이는 시간에 관하여


각각의 사진을 촬영하는 시간, 사진으로 풍경을 구성하는 시간, 사진을 수직 수평의 그리드로 구획하는 시간, 구획한 사진을 종이에 프린트하는 시간, 순지를 자르는 시간, 순지 한 칸에 그림을 그리는 시간, 낱장의 순지를 붙이는 시간, 공기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그림을 바라보는 시간,,,




넷. 두께와 무게, 그것을 만진 사람에 관하여


그림 곁에 바다에 관한 개인적인 기억을 꺼낸다. 정확하게는 바다의 이미지에 관한 기억이다. 몇 년 전 나는 어느 단과 대학의 아카이브에서 대학 설립의 시초가 된 선교사의 앨범을 발견한 적이 있다. 선교사는 조선으로 건너오는 배에서 바다를 찍었다. 100여년 전 그가 보았던 물을 다시 마주하려는 것은 빠트린 칼을 되찾으려는 희망만큼이나 헛되다. 나는 그가 어디 즈음에서 바다를 찍었는지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지형지물이 없는 권세진의 바다도 익명적이다. 촬영된 순간과 장소에 대한 기록은 GPS가 탑재된 작가의 카메라에 남아있다. 그러나 그림의 배경이 된 장소로 가도 같은 물을 볼 수는 없다. 물은 더 이상 그곳에 없다.


선교사는 장치와 기억의 한계를 넘으려 했다. 그는 흑백 사진에 자신의 기억 속 푸른색을 들였다. 반대로 작가는 디지털 사진의 색을 없애고 흑백의 조형 요소로 환원해 먹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작가의 그림은 선교사의 사진과 또 다른 접점을 지닌다. 손바닥 만한 선교사의 사진을 뒤집으면 푸른색 잉크로 쓴 글씨가 있다. 선교사는 바다가 아름답다고 생각해 푸른색으로 글을 썼을 것이다. 사진 뒷면의 글은 아름다움을 느낀 사람이 있었다는 증거다. 마찬가지로 권세진의 종이는 작가가 그림 앞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날마다 변하는 작가의 몸과 날씨에 따라 낱장의 종이에는 미세한 차이가 생긴다.


이따금 작가는 벽면에 얇은 종이를 핀으로 설치한다. 바다를 구성하는 종이. 시간의 흔적인 종이. 습기에 늘어지고 바람에 하늘거리는 종이. 해수면의 이미지를 머금은 종이. 이미지를 지탱하는 종이. 그리고 그 자체로 이미지인 종이에는 두께와 무게, 그리고 뒷면이 있다. 이에 그의 바다 그림은 수면으로 끊임없이 떠오르는 심연을 암시하게 된다.




글  윤형신




















권세진 개인전《우묵한 깊이 Overthrust》

일시: 2023. 2. 3 ~ 2. 26. 

공간: space 298

주소: 포항시 북구 중앙로 298번길 13

시간: 10:00 ~ 19:00 휴관일 없음

후원: 포항시, 포항문화재단

기획, 글: 윤형신

디자인: 김소정

사진: 조영하

영상: 신명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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