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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신 Nov 26. 2023

(무제)

《사인의 편집자》글 윤형신

장미목 장미과 딸기속에 속하는 딸기는 바다에서 자라는 식물이 아니다 바다 속에서 자라는 바다딸기도 있지만 그건 어떤 과학자가 생김새만 보고 제멋대로 붙인 산호의 이름일 뿐이다 누구들은 그날 하루에 두 도시를 오갔다 누구들은 제각기 숙소에 도착했다 누가 도착한 시간은 별이 보일 정도로 깜깜한 밤이었다 숙소에서 퉁퉁 불은 라면을 먹고 잠이 들었다 일어나니 아침에 누가 딸기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는 말하는 도중에도 잠깐씩 잠이 들었다 깼다 누구는 잠깐 일어난 참에 딸기 홍차를 끓였다 다시 잠에 드는 게 낫지 않겠어요 꿈에 딸기가 한 바구니나 나왔다면서요 그거 알아요 딸기는 원래 한철 과일이예요 적당히 차갑고 따뜻할 때만 나는데 너무 많은 누구들이 딸기를 먹고 싶어서 억지로 몇 달이나 하우스에서 키우는 거라고요 딸기를 키우는 하우스에서 정말로 잠이 들고 일어나는 누구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건 진짜 딸기 맛이 나요 편의점에서 파는 인공 딸기향 음료랑 달라요 잠에서 깨려면 딸기 맛이 나는 홍차를 마셔야 해요 누가 커피 포트에 물을 끓이고 딸기 홍차 주머니를 찢어 넣었다 티백에 달린 종이가 물에 빠졌다 누구는 바람 부는 창가에 뜨거운 찻잔을 올려놓았다 홍차가 식을 때 즈음 누가 주머니에서 딸기 사진을 꺼내 보여주었다 딸기는 하얀 고양이였다 고양이의 분홍색 혓바닥이 딸기처럼 보였다 누구는 고양이를 키우다 보면 가끔씩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고 말했다 저도 그거 알아요 요즘에는 식물 하나 키우기 어려운데 누가 같이 돌보지 않으면 혼자서는 힘들어요 나도 언젠가는 딸기를 키우고 싶어요 바닥과 몸 안에서 뜨끈한 기운이 올라왔다 누구들은 쉽사리 일어나지 못하고 느적거렸다 12시쯤 전화가 걸려왔다 아직 안 가셨어요 정리하셔야 해요 올 때도 그런 식이었다 주인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제가 막 바빠가지고 거기 계속 가 있을 수가 없어요 저기 밑에 저기 조금만 쭉 내려가면 바로 코앞에 펜션 두 개가 있으니까 거기 물어볼게요 그래서 전날까지도 어디서 잠이 들지 알 수가 없었다 만난 게 신기한 일이었다 각자 들고 온 짐이 한짐이었다 더 이상 숙소에 있을 수가 없다 이제 가시려나봐요 맞아요 저희는 딸기를 찾으러 왔어요 여기에는 딸기가 없는데 상관없어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누구들은 굳이 바다로 가서 딸기를 찾겠다고 했다 바다 쪽으로 난 작은 길은 흙길이었다 발을 뗄 때마다 흑먼지가 풀풀 날렸다 말을 하고 웃을 때마다 흙이 어금니에 씹혔다 그 와중에도 누구는 길가에 늘어선 포도나무를 그릴 거라고 말했다 누가 주워올린 나뭇가지에서 딸기를 닮은 솔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누구는 그것을 줍지 않았다 30분쯤 걸어서 도착한 바다에는 모래가 한가득이었다 모래 언덕에 얹혀있다시피한 카페에서 장미 비슷한 것을 보았다 도톰한 이파리가 겹겹이 달린 식물들은 장미 꽃잎을 닮은 로투스를 뽐내고 있었다 그러나 화분이 들어찬 카페에도 딸기는 없었다 기다란 기린 모양 나무 조각 두 개가 머리를 맞대고 있을 뿐이었다 기다란 나무 조각의 엉덩이에는 동그란 나무조각이 달려 있었다 누구는 엉덩이 끝에서 달랑거리는 조각을 보고 딸기를 닮았다고 억지를 부렸다 누구는 누군가가 딸기를 가져온다고 해도 먹고 싶지 않다고 했다 딸기를 생각하면 가져온 누가 생각이 나서 삼킬 수가 없다고 했다 빨간 딸기에 이백개씩 달려 있는 노란 씨앗을 떠올리기만 해도 목구멍이 긁히는 느낌이라고 했다 말은 고개를 돌리고 했지만 딸기가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딸기 없는 정원에서 나와 바다로 갔다 누가 발목을 걷어 붙인 채 바닷가 쪽으로 걸어갔다 누구의 발자국 주변을 서성이다 누구를 따라 신발도 양말도 벗었다 발 끝이 시렸다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 바람이 부는 쪽으로 가는 중이야 물이 역류하고 있어 역류하는 게 아니야 이건 자연스러운 거야 지금은 저녁이고 물이 밀려들어오는 시간이란 말이야 말하는 동안에도 바닷물이 차올랐다 누가 바다로 가는 건지 바다가 누구에게 다가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누구는 바다로 걸어 들어가다가 밀려들어오는 물에 휩쓸렸다 그리고는 나오지 않았다 바다딸기라도 찾으려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냥 잠깐 저렇게 둬 누구를 혼자 두고 바닷가를 걷다 보니 빨갛고 동그란 해가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하늘빛과 바닷빛이 딸기 빛으로 물들어 갔다 마치 누구의 흔적처럼 검은 머리채 같은 형상이 저 멀리에 둥둥 떠 있었다 있잖아 바다딸기는 따뜻한 바다에서만 자라는 동물이래 여긴 바닷물이 너무 차잖아 바다딸기건 진짜 딸기건 보려면 돌아가야해 누구들은 딸기가 없는 곳에서 잘도 딸기를 찾고 싶어했다 모래 위의 조약돌이 딸기색으로 물들어 갔다 누구는 주머니에 딸기색 조약돌을 하나 주워 넣었다 해가 바다 속으로 거의 들어 갔을 때 누가 몸이 다 젖은 채로 나왔다 누구의 뱃속도 옷도 딸기 홍차색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바다가 딸기색으로 물든 건 아주 잠깐이었다 젖은 발을 말리면서 누구들은 편의점쪽을 향해 걸어갔다 누구를 기다리는 동안 가짜 딸기향이 나는 과자 한 봉지를 꾸역꾸역 샀다 딸기 색에 물든 누구들은 가짜 딸기향이 나는 동그란 과자를 조금씩 나누어 먹었다 과자를 먹는 동안 누구는 집에 가서 딸기 꿈을 꾸겠다고 했다 누구는 딸기를 안겠다고 했다 누구는 딸기향 담배를 피는 누구를 걱정했다 누구는 다 같이 딸기를 키우자고 했다 딸기색으로 뺨이 물든 누구는 말이 없었다 바다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묻지 못했다 장미목 장미과 딸기속에 속하는 딸기는 바다에서 자라는 식물이 아니다






이 글은 필자가 기획한 전시《사인의 편집자》(작가: 고현아, 박하늘, 박효범 / 공간: 오온 / 기간: 2023. 7. 5. ~ 30.)에서 전시하고, 7월 5일과 30일에 낭송한 글입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필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인용 시에는 출처 표기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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