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인드빌더 Mar 30. 2023

친절한 심리학자 6

치과 의료진이 친절하면?

이 매거진을 한두 편이라도 본 분들이라면 심리학자(=나)가 친절한 것보다 심리학자가 경험한 친절을 쓰는 글이라는 걸 아실 테지. 


오늘, 치과를 다녀왔다.


누가 배경음으로 어두침침하고 의미심장하고 충격적이고 공포스러운 음향을 넣어주면 좋겠다. 우리 모두는 치과에 다녀온다는 그 기운을 알고 있다. 내가 치과에 가게 된 배경은 '벼락치기하는 심리학자'에서 확인하시길.


암튼, 소리소문 없지만 친절하고 과잉진료 안 하는 것으로 알려진(적어도 내 남편과 네이버 후기를 쓴 몇 분에게는 그렇게 알려진) 치과에 다녀왔다. 신도시 한복판에 있는 치과라고 하기에 상당히 올드패션인데 레고 작품도 있고 마룻바닥도 있고 커다란 벽걸이 티브이도 있고 로봇 청소기도 있고, 방석이 깔린 가죽소파도 있고, 채광이 좋은 창에 붙은 안내문은 앞뒤로 인쇄되어 있어 뒷면이 반사되는 통에 글자를 한 개도 읽을 수 없지만, 묘하게 나른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치과 같지 않은 곳이었다.


비슷하게 나른한 분위기를 가진 여자 직원분(간호사님일까 간호조무사님일까 치위생사님일까 행정실장님일까)이 나오셔서 친절한 건지 어떤지 모르는 말투로 어떻게 오셨어요? 불편하신 덴 없으신가요? 하고 조용히 묻는다. 여차저차 자기소개와 내 치아소개를 하고 초진 개인정보를 쓱쓱 적어내리니 불안하기 짝이 없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한적한 시간이어서(이곳은 언제 바쁘기는 한 걸까?) 금방 내 차례가 되었다. 의사 선생님이 느린 걸음으로 나와 내 옷을 받아 들며 "겉옷 걸어드릴게요" 하며 옷걸이에 내 외투를 스윽 스윽 느리게도 걸더니 "가방도 걸어드릴게요"하고 내 가방을 받아 들더니 외투를 건 옷걸이에 같이 걸어주신다. 황송하기 그지없어서 불안해야 할지 감사해야 할지 어쩔 줄 모르고 있었는데 치아 엑스레이도 손수 안내해 주시고 사진도 찍어주신다. 이제, 대망의 치과 진료대에 누웠다.


이렇게 저렇게 치아를 살피시더니 "아아 충치가..." 하는 작은 목소리에 심장이 내려앉는다. 얼마만의 충치인가. "치아 사진 좀 찍을게요"하시더니 작은 거울과 큰 카메라를 들고 달달 떨리는 내 볼 근육을 느끼셨는지 어떨는지 모르지만 능숙하고 느리게 사진을 찍어주신다. 결론은 금으로 때운 이는 금이갔고, 바로 옆 이는 양쪽으로 충치가 생겨 둘 다 크라운을 씌워야 한단다. 친절하게 견적도 알려주시고, 신경치료가 추가될 경우 추가비용도 알려주셨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나는 아무 말이나 막 하고 있었다. 아니 선생님 제가요 어제 치아보험을 권유받았는데, 3개월 후에 만약에 왔다면 괜찮았을까요.


금이 간 이가 3개월을 버텼을지 잘 모르겠네요. 더 악화되기 전에 오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합시다.


조용하게 웃으시는 선생님 얼굴을 보며 잠깐 나갔던 정신이 돌아왔다. 네, 맞아요 선생님. 그렇게 생각할게요.


결제를 하고 예약을 잡는데 내일은 혹시 안 되겠지요 하니 직원분이 당황한 듯 자조하듯 재미있다는 듯 풋 웃으시며 내일도 가능하단다. 


무이자할부가 혹시 될까요? 국민카드요. 아 국민카드, 어제 국민카드 뭐라고 하면서 치아보험 들으라던데. 제가 요즘 열심히 살고 있었는데 이렇게 돈이 나가네요. 3개월로 해주세요. 다음 달과 다다음달의 저에게 진료비를 열심히 벌라고 해야겠어요. 


아무렇게나 주워섬기면서 삼성페이 핸드폰을 내밀자 결제를 해주시면서 또 그 특유의 나른하고 조용한 웃음을 띠고는 하시는 대답이,


나에게 선물한다고 생각하세요.


감동과 이해의 쓰나미가 몰려오고, 나의 90만 원에 대한 애도로 마음이 쓰라리다. 되게 싹싹한 영업직이라면 빈말처럼 느껴졌을 저 말이, 나름의 위로가 된다. 치과를 나오면서 생각하니 좋은 집주인이 초대해 준 점잖은 정찬에 다녀온 느낌이 든다. 나름의 유머와 차분함과 질서가 있는 곳. 그래, 나에게 선물한다 생각하자. 이제 와서 3개월을 버티며 거짓말을 하며 보험을 들 수는 없다. 써야 하는 돈. 새로 씌워야 하는 치아. 열심히 벌면 되지. 갑자기 이빨도 아픈 것 같고, 빨리 치료하는 게 좋다.


내가 좋아하는 친절은 이렇게 형식적이지 않으면서 진심이 느껴지고 상대방 감정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밴 느낌의 친절이다. 그나저나 나오면서 영수증은 아주 꼬깃하게도 구겨놨다. 


매거진의 이전글 끼니를 걱정해 준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