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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인드빌더 Oct 26. 2023

남편의 삭발식

배우에게 삭발이란

햄릿, 걷는 인간이 막을 내리고 (어제)

남편은 다음 공연을 위해 머리를 밀었다(방금).


아무렇지도 않게 바리깡을 사서 약간 즐거운 듯 욕조에 똬리를 틀고 앉은 그는 거침없이 머리를 밀기 시작했다. 황금색 보자기를 가운 삼아 두르고, 속옷만 하나 걸친 성인 남성이, 20년 된 보석 박힌 플라스틱 손거울을 앞에 세우고, 머리를 밀고 앉아있는 모습은 장르가 어렵다. 이건 시트콤인가, 호러인가, 코미디인가, 범죄물인가, 리얼리티인가.


유독 풍성한 머리숱을 자랑하던 남편이다. 본인은 자랑하지 않았지만 내가 내심 자랑스러웠던 걸까. 머리 한가운데로 길게 길이 나고 쉼 없는 손놀림에 날것의 두상이 드러난다. 나는 거침없는 그의 손놀림이 야속하고 수북하게 쌓이는 머리털들이 아쉽다. 간혹 흰머리가 보인다. 잘생긴 두상은 아니지만 제법 비율은 괜찮다. 뒤통수에는 남편이 예술가의 뿔이라고 부르는 혹 같은 모양이 있는데 그걸 촉각이 아닌 시각으로 느끼게 될 줄이야.


이게 자기 머리를 막 밀만큼 가치 있는 일이야? 아니면 자기 머리가 그렇게 별 가치가 없었던 걸까? 하는 질문을 하고서, 별 소용없는 질문임을 깨닫는다. 남편은 그저, 극에 필요하다면 몇 키로쯤 증량하고, 감량하고, 머리를 탈색을 하거나, 밀어버리거나 하는 것이다. 그의 동작은 가볍고, 내 마음은 무겁다.


머리채가 한 짐이었는데 봉투에 넣고 보니 가볍다. 남편은 머리가 시원하다 하고 모든 모자가 커졌고 안경이 색다르게 어울리는 모습이다. 생각보다 괜찮고 생각보다 괜찮지 않다.


건강한 머리털이 자랄 거야..라고 스스로 위로해보려 한다. 지지난 공연에서는 탈색했으니 그래, 삭발도 할만하지. 하고 설명도 해본다. 그러다가 예정되어 있는 두 공연의 연출들이 아무도 삭발을 먼저 요청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헛웃음이 나온다. 본인이 생각한 캐릭터에 맞는 머리였던 것. 그래, 맡은 역할에 저리 충실하니 남편도 아빠 역할도 충실할 것이다...라고 애써 생각해 본다. 남편은 준비되었으나 나는 준비되지 않은 오늘의 삭발식.


다이어트를 하려고 했지만 마라샹궈를 주문해야겠다. 아차차, 나는 남편의 연이은 공연으로 경추성 두통이라는 있어 보이지만 별거 아닌 진단을 받고 도수치료를 받고 왔다. 스트레스 영향이 크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아침드라마에 뒷목 잡고 쓰러지는 바로 그 근육이라고 이해가 잘 되는 친절한 설명도 덧붙이셨다.

- 왜 제가 아픈지 너무 이해돼요. 그럴만합니다.

- 누가 괴롭히나요?

- 삶이 저를 괴롭힙니다 선생님.

우리는 어른처럼 웃고 있었고, 서로를 잘 이해했다. 마라샹궈를 먹고, 약을 먹어야지. 그리고 물리치료사 선생님 말씀처럼 바로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자야겠다. 자다가 울애기한테 맞지 않게 해 주세요. 자다가 울애기가 제 위로 기어올라오지 않게 해 주세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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