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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여진 May 15. 2020

나는 아직 네가 나오는 꿈을 꾼다

괴로워해야 하는 것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다

자다 깼다. 드물게도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다. 전부 꿈이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느껴졌다. 그 다음으론 억울함이 나를 찾아왔다. 난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나만 이렇게 그 일이 떠오를 때마다 괴로운 건지. 정녕 괴로워해야 마땅한 건 그들이 아닌지.


2018년, 초등학교 6학년 시절 나는 반에서 마주하기 괴로운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이었다. 책에 몇 번씩 그들의 이야기를 썼기 때문에 누군가는 지겨운 불행 팔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 한 번으로 분량 잘도 뽑아먹는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나만 괴로운 줄 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불행을 과시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단지 글을 써야 할 것만 같기에 글을 쓰는 것이다. 이렇게 글로라도 풀어내지 않으면, 나는 몸이 점점 부풀어 오르다 터져 버리고 말 것이다.     


꿈의 초반. 어쩐지 나는 중학교 2학년에 그들과 다시 같은 반이 되었다. 최대한 무시해보고 길가를 지나가는 나를 A양이 불러 세웠다. A양이 그냥 지나가던 내게 무어라 시비를 걸었다. 꿈의 내용인지라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나는 A양에게 한마디밖에 할 수 없었다. 다시 만나면 네 논리에서 틀린 점, 내가 화난 부분, 그때 하지 못한 말,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해서 벙어리처럼 서 있던 나날에 대한 복수를 해 주려고 생각했다.     


그들을 다시 만나면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내 안의 어떤 부분은 아직 그들에게 상처받던 때에 머물러 있었다. 결국 나는 다시 꿈속의 그들 앞에서 얼어 버리고 말았다. 꿈속의 나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힘겹게 이 한 마디를 꺼냈다.     


“넌 정말 나한테 미안한 게 없니?”     


그녀는 뭐라 웅얼거리며 대꾸하려 했지만, 더 이상 대화의 가치를 느끼지 못한 나는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기막혀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꿈속에서 우리 반을 맡게 된 선생님에게 벌써부터 A양이 선생님께 이런저런 알랑방귀를 뀌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선생님이 A양의 말만 듣고 내게 선입견이 생기진 않을까, 내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지 않을까 초조했다.     


선생님께 찾아갔다. 선생님은 나를 웃으며 맞이했다. 쉬는 시간, 잠시 운동장을 걸으며 선생님께 A양에 대한 말을 했다. A양이 말한 것처럼 나는 나쁜 아이가 아니며, 오히려 나를 괴롭힌 것은 A양이라고도 말했다. 선생님은 미소 지으며 잠자코 듣고 계셨다. 나에 대한 오해가 풀린 것 같아 안심하고 있는데, 수업을 시작할 시간이 다 되어 가서 선생님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반으로 가는 도중에도 선생님과 대화를 했는데, 조용히 듣던 선생님의 표정이 싸하게 바뀌었다. 아부 좀 그만 떨어. 차가운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선생님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싸늘해진 분위기를 다시 풀어 보려고 선생님 주위를 맴돌며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선생님이 어딘가로 눈짓하자 무서운 표정을 한 키 큰 여자애들 둘이 나에게 달려왔다. 나는 두려움에 전속력으로 뛰어 도망쳤지만 그들과의 거리는 도통 벌어지지 않았다.     


하염없이 도망치고, 또 도망치던 나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우리 집 천장이었다. 다 꿈이라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지독한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울었다. 억울했다.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가끔 그들이 나오는 꿈을 꾸면 눈물을 걷잡을 수가 없다. 그들은 단 한 번이라도 꿈에서 나를 보았을까? 깨고 나면 안도감과 억울함에 나처럼 펑펑 울어 본 적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래서 더 억울했다.    

 

나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나 혼자 괴로워야 하는가. 내게 상처준 건 그들인데 왜 나만 그들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가. 그들도 나만큼 괴로우면 좋겠다. 평온한 저녁 내 이름 세 글자가 생각하자마자 감정이 복받쳐 엉엉 울면 좋겠다. 더는 바라지 않는다. 딱 내가 괴로웠던 만큼만, 딱 내가 괴로운 만큼만 그들이 괴로웠으면 좋겠다.     


억울했다. 피해자인 나는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려 오는데 그들은 나를 생각해도 아무 감흥이 없으리라는 점이. 나와 그들을 놓고 보면 정말 행복할 자격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닐까. 다른 모든 일에서도 내가 깨끗하리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들과 나를 비교한다면 행복해도 좋은 사람은 내가 아닐까. 그런데 왜 세상은 내가 행복한 얼굴로 미소 지을 수 있게 내버려 두지 않는 걸까.     


1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아직 과거의 일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가 불쌍하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글을 쓴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가뿐해지도록 글을 쓴다. 그러나 매번 이제 됐다, 생각하면서도 다시 그들에 대해 글을 쓰는 걸 보면 아직 내 마음이 많이 아픈가 보다. 왜 저렇게 같은 얘기만 계속 하지, 이만하면 불행을 팔아먹는 건 할 만큼 한 거 아닐까. 내 글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든다면 이젠 그만큼 많이 괴로웠구나, 하고 넘어가 주었으면 한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내 글을 읽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 내 괴로움을 보고 누군가 불행 팔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내게 있어 두 번째로 괴로운 일이 되리라. 꿈 속의 나처럼 진짜 나도 누군가에게 내 불행을 꺼내 보여준 적이 있다. 그 때의 일을 가감 없이 사실대로 내뱉고 나자 잠자코 듣던 그가 이렇게 말했다.     


“나 걔 되게 착한 줄 알았어.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말을 들었을 당시에는 실제로 당한 사람이 뻔히 듣고 있는데 그렇게 안 보인다고 말해서 화가 났다. 그러나 지금은 나는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는데 괜찮은 사람, 착한 사람의 이미지를 유지하며 원만한 관계를 이루어 왔다고 생각하니 A양에게 더 화가 났다. 나는 상처받은 기억 때문에 새로운 친구들에게 다가가는 게 무서웠다. 아직도 그랬다. A양은 미워하고 싶을 만큼 너무나도 멀쩡했다. 그런 현실이 내 마음을 쿡쿡 찔렀다.     


관계에 상처받고, 아파하는 사람이 이 하늘 아래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로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파하는 것은 자신이 저지른 업보에 대한 대가이기만 해도 족하다. 우리는 우리가 범하지 않은 죄로 아파할 이유가 없다. 괴로워해야 하는 것은 당신을 괴롭힌 사람이다. 당신이 아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길 바란다.

  

부디 모든 피해자들이 발 뻗고 잘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그런 사회가 아니라면, 존재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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