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피쉬> 감상문 (결말을 중심으로)
저항과 자유의 이야기: 애시와 에이지의 체공시간 (결말을 중심으로)
본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애시의 삶은 소용돌이였습니다. 커다란 흐름은 그르 자꾸만 어두운 곳으로 끌어내리려 했고 애시는 필사적으로 항전했습니다. 분노와 저항으로 살어낸 삶입니다. 그러면서도 죽고 싶어한 적은 없었습니다. ('죽는 게 낫다'는 유혹을 받은 적은 있다 고백했지만요.) 삶을 사랑한 적 없으나 버린 적도 없지요. 그것이 애시의 위대한 점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애시는 에이지를 만나 이베가 본 것을 보았습니다. 단 2.5초의 체공시간, 여명을 배경으로 날아오르는 에이지의 유려한 투신을.
애시는 그를 가로막는 벽을 부수어버리거나 등뒤의 추격자를 응징하며 살아남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날 자신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벽을 뛰어넘는 에이지를 본 순간, 그에게 매료될 수밖에요. 파장이 향응하듯, 여명에 몸을 던진 것처럼 기꺼이 에이지는 자신에게 휘몰아치는 애시의 운명으로 뛰어듭니다.
애시는 에이지와 있을 때만큼은 링크스(스라소니)라는 칭호와 달리 제법 평범한 소년처럼 보입니다. 길었던 지옥에 비해 아주 짧았던 네 번의 계절만이 애시와 에이지가 공유한 체공시간일지라도요. 그리고 그 계절 끝에 애시는 평생 갈구해온 자유를 쟁취해냅니다.
쟁취한 자유의 형태는 놀랍게도 고르치네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몇발짝의 달음박질이었습니다. 애시는 일본으로 떠나는 에이지에게 향하려고, 어쩌면 그와 함께 비행기를 타려고 달렸습니다. 줄곧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에이지에게 스스로 다가감으로써,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라는 목적이 아니라 온전한 의지로 에이지를 향함으로써 애시는 자유를 찾았습니다. 장대높이뛰기보다 조금 더 길 몇 초, 그 짧은 사이.
"왜 틈을 보인 거야…!"
평생 몸에 두르고 살았던 긴장을 전부 늦출 정도로, 그리하여 습격을 허락할 정도로 환희에 가득 차서.
"난…, 무엇으로부터 널 그렇게 도와주고 싶었던 걸까?"
애시가 라오의 칼에 찔리는 일은 거의 운명처럼 느껴집니다. (애시와 에이지가 이 말을 들었다면 진저리를 쳤겠죠...) 평생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온 그가, 가장 자유로워진 순간 맞는 죽음. 모든 일은 그렇게 이루어져야 했던 것처럼 이루어졌습니다.
습격과 달리, 애시의 죽음은 운명이 아닌 선택이었습니다. (급소를 피해서 찔린데다 그 애시이니 응급처치를 받았더라면, 도서관이 아니라 병원을 향했다면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니까요.) 애시가 한때 죽음에 유혹당한 것은 편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애시가 마지막에 죽음을 택한 것은 도망치기 위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에이지가 ‘애시는 표범과 달리 선택할 수 있다’고 믿은 것처럼요.
편지를 쥐고 뉴욕공립도서관으로 향하며 애시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눈 대신 책 쌓인지고한 고독 속에서 기어이 표범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동물처럼…….
어느 쪽이든 되돌아갈 수 없단 걸 알았을 거야.
애시가 에이지에게로 향하지 않는 길을 택한 이유가 무엇이든, (에이지를 위험에 빠뜨릴까 두려워서? 평생 살아온 길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찰나의 자유로 극상의 행복을 맛보았기 때문에? - 마지막 관련 <바나나 피쉬를 위한 완벽한 날>에 흥미로운 해석을 남긴 블로그가 있다. - 그 행복을 잃는 고통을 다시 맛보지 않으려고?) 에이지와 몇 계절을 더 보냈더라면, 그에게 그토록 많은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애시는 죽지 않기를 선택했을까요?
증오하며 군림하느니 사랑하고 멸망하는 길을 택했다.
글쎄요. 이 작품이 소년만화였다면 애시는 어떻게든 비행기를 탔을지도 모르지만요. 애시의 선택은 <빛의 정원>으로 이어지는 미래를 생성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결정은 일종의 기도와도 같다고까지 느껴집니다. 에이지가 무탈하고 안전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덧붙여, 가이드북에 애시가 일본으로 갔다면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작가의 말이 나온다고 합니다. 고르치네에게 잡혀있었을 때 정신적인 문제로 음식을 거의 섭취하지 못했던 것처럼 애시는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지요. 일본으로 갔다 해도 궁극적인 해피엔딩이 기다렸을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처음 엔딩을 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플랜더스의 개>였습니다.
어떤 판본에서 주인공 네로는 줄곧 보고 싶었던 성화를 보고 미소를 띤 채 죽어 발견됩니다. 애시 또한 성화에 비견되는 미소를 띠고 죽어갔지요. 쇼터가 처음 애시를 보자마자 떠올렸던, 크리스마스 카드의 천사와도 같은 얼굴로.
에이지의 편지는 네로가 꿈꿔온 성화처럼 애시가 평생 손에 쥐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단지 알료샤>에서 주인공 알료샤는 어느날 깨닫습니다. 일평생 연이 없던 '사건'이 자신에게 일어났음을요. 그 '사건'이란 바로 남에게 필요해지고 끌어안아지는, 즉 누군가가 자신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일입니다.
애시의 인생에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순간이나마 새처럼 날아 자유를 쥔 그 존재는, 애쉬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힘도 약한 주제에 그를 보호하려 드는데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믿어주고 아무리 떨어뜨려놔도 달려오는 데다 거리낌없이 자신을 친구라 칭하기까지 합니다. 그리하여 애시는 에이지를 사랑하게 됩니다.
에이지가 사진을 찍은 (혹은 유사한) 그 창에서 애시는 에이지가 무사하길 바랐습니다. 고르치네는 애시를 신으로 만들려 했으나, 애시는 에이지 덕에 신에게 기도하고 차라리 자신을 데려가달라고 빌었지요. 사람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사랑이기 때문일까요? 신은 기구하게도 그 소원만은 들어주었습니다.
난 운명으로부터 널 지켜주고 싶었어
널 끌어가고 휩쓸어 가는 운명으로부터
에이지가 없었더라도 애시는 계획을 달성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끝에 어떤 모습이 되어 있었을지요. 애시가 자학하듯 말하는 악마가, 쇼터가 충고한 타인의 마음을 쥐고 흔드는 존재가 되어 있었을지도요. 에이지는 그런 운명에서 애시를 휩쓰는 파도를 막고 섰습니다. (방파제는 견고한 벽이 아니라 얼기설기 얹힌 테트라포드의 집합이라는 점에서 어울립니다.) 에이지는 애시를 지키고 싶다고 했지만, 부상 등등으로 인해 나비효과처럼 애시는 에이지의 안녕을 기원하게 된다는 점이 아이러니합니다. 압도적인 흐름 속에서 그 염원만큼은 애시의 뜻대로 된 셈입니다.
애시의 고향인 케이프코드에 머물렀을 때, 날이 밝아올 무렵 에이지에게 총 쏘는 법을 알려주던 장면이 있습니다.
이때 나온 OST의 제목은 <HOMETOWN>인데, 엔딩에서 나온 <Liberty>와 전개가 같아요.
애시는 고향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쾌한 기억도 그리운 추억도 전부 여기에 있다.
애시는 에이지에게 형을 겹쳐봤습니다. 그러고보니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편지뭉치가 발견되자 애시가 "이 집에서 편지를 쓴 건 형뿐이었어."라고도 했지요. (+ 폭스의 성폭행 후 말없이 애시를 안아주던 에이지는 분명 외전 <Private Opinion>의 블랑카를 연상시킵니다.) 이처럼 고향과 자유의 유사성은, 타인의 위압과 욕망에 맞서지 않아도 되었던 시절에 있는 듯합니다. 애시가 천진하던 유년기와 삶의 마지막 몇 시간이 다였지만요.
소년으로 죽는 이들, 영원한 소년으로 남는 캐릭터들. 그런 건 필요 없다고, 길게 살아서 중년도 노년도 되어달라고 오타쿠는 울부짖지만 그들은 그렇게 사는 방식밖에 몰랐습니다. 다른 방식을 배우기 전에 너무 빨리 '신의 집'에 다다랐습니다.
그렇게, 어두운 밤동안 자신을 불살라왔던 재Ash는 이윽고 여명Aslan이 됩니다.
넌 혼자가 아니야. 내가 곁에 있어. 내 영혼은 언제나 너와 함께야.
애시의 영혼을 구원하는 말과 함께…….
본편을 다 보고 <빛의 정원>을 읽기 전 짧은 시간동안 에이지의 미래를 궁금해했습니다.
에이지는 살아가는 동안 애시의 마지막을 듣게 될까. 에이지는 다시 뉴욕에 왔을 때 도서관에서 보게 되는 것은 애시의 유령일까. 어쩌면 저 먼 카리브해로 떠났다고 믿게될지도 모른다. 평생 이 세상 어딘가에서 숨쉬고 있을 애시를 그리워하며 길거리에 보이는 애시를 닮은 뒷모습을 쫓아갔을지도 모른다, 라고……. 애시를 죽인 작가님에게 너무 무른 것을 바랐지요.
그렇다면 에이지가 애시의 죽음을 몰랐더라면 좋았을까. 적어도 에이지는 바라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빛도 어둠도 직시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니까요. <빛의 정원>에서 에이지는 말합니다.
"난 그를 잊지 않아. 잊으려 하지도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불행한 건 아냐. 그는 열심히 살았어. ... 그의 기적과도 같은 인생과 짧은 순간이나마 함께 지낼 수 있었다는 것에 난 감사해."
머리를 기르고, 편지 일을 묻어두고, 애시의 사진을 치우고 필름 통을 넣어두고. 그렇게 오랜 애도 끝에 에이지는 애시를 양지로 꺼내주었습니다. 모든 것이 시작된 케이프코드의 정원에서 빛을 받으며. 그곳으로 애시와 꼭 닮은 이름을 지닌 소녀를 데려와 껴안으며. 자신이 구한 또 하나의 생명-버디-과 하염없이 영사기가 비추는 빛의 시절을 돌아보며 이제 구형 컴퓨터를 넘어 뉴욕 갤러리의 가장 깊숙한 곳에 애시를 불러냅니다. 그렇게 둘은 함께 있습니다. 애시가 지켜낸 도시는 그를 기억할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애시 얘기밖에 안 했지만 작품을 볼 땐 리웨룽 얘기를 주로 했는데(...),
리웨룽이 에이지를 그토록 증오했던 이유는 그가 멋대로 애시를 자신과 비슷한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IDOLiSH7의 츠쿠모 료처럼) 사실 객관적으로도 닮은 면이 있어 보이지만, 애시가 이 소리를 들으면 '뭐라는거임?' 하고 님 죽일걸요. 나와 비슷한데도 왜 애시는 자신처럼 고독하지 않은가. 왜 그에게는 약점이 있는가. 감히 어떻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가. 그 왜곡된 마음이 에이지를 향한 것입니다.
애시에게 에이지가 유사 형님이었다면 웨룽은 작중 현재 인격적인 관계를 갖지 못한 것으로 보여요. 물론 타고난 기질 차이도 있겠지만, 결정적으로는 경험 차이였다고 봅니다. 애시는 집밖으로 나돌면서 맨해튼을 휘젓지만, 유시스는 주로 집안에 둘러싸여있었기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를 맺을 기회가 부족했던게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아니면 죄송. 과거 아시는 분 제발 알려줘요)
그나마 신 스우린과 블랑카가 웨룽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편인데, 이 또한 웨룽의 경계심으로 잘 풀리지 않습니다. 리웨룽은 어릴 적 아버지의 표상이 남아 있어서, 자신을 비호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에게 곧잘 끌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략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애시에 이어 블랑카에게 끌렸던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신이 몇 년만 더 나이가 많았다면 나았을까요?(ㅠㅠㅠ
아무튼 블랑카는 다음과 같은 대사로 에이지를 죽이려는 유시스를 저지합니다.
"오쿠무라 에이지를 애시에게서 빼앗는 것은, 우리 같은 사람들을 하나 더 만드는 일일 뿐입니다. 사랑하지도, 사랑받지도 못해 증오와 허무만으로 살아가는 가련한 인생이..."
리웨룽은 에이지더러 세상에는 이유 없는 악의에 가득찬 사람이 있다고,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듯이 말했지만 그또한 만들어진 악인이었을 뿐입니다. 리웨룽은 분명히 블랑카의 말에 흔들립니다. 애시가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직시하며 자신의 삶을 투영했기 때문인지, 블랑카 또한 자신처럼 고독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인지 이 시점을 기준으로 <Banana Fish>에서는 (저에게는 애석하게도) 퇴장합니다.
첫 등장에 비해 점점 찌질ㅠㅠ해진다고 느끼실지도 모르지만, 웨룽 또한 어리고 어리석은 존재였음을 기억해주시면 좀... 좋아지지 않을까요? (근데 몇살이죠?) 마지막에 신이랑 지랄맞게 성질부리는 대화가 정~~말 좋았는데 빛의 정원에선 한 번도 언급이 안 나오더라고요? ㄱ- 그의 추후 행보는 대충 들었습니다... #인과응보
1.
자신을 해치려는 이들을 죽이는 데 거리낌없는 애시이지만, 여전히 정상적인 도덕관념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을 좋아했습니다. 파파디노에 의해 강제로 참여한 회의에서 유리한 조건을 가져오기 위해 악마같이 아름다운 얼굴로 비인도적인 방책을 내놓고 나중에 구역질을 한다거나, 아래 "버려도 돼"라는 대사 같은 것들이요.
8살에 사람을 죽인, 10살에 곰을 잡은, 수많은 갱에게 총구를 겨눈, 인명을 학살하는 군사적 전술을 구사하는 애시에게마저 사람의 마음이 있다고... 피해자이고 살인자일지언정 인간의 마음을 버리지는 않았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위안을 받았다네요.
2. 사실 이 글은 바피 결말을 납득하기 위해 쓴 글이라서요. 위에 결말을 납득하고 포용하는 듯 잘난듯 썼지만 저 또한 울부짖는 오타쿠였을 뿐이기에(뭔소리야? 뭔소리냐고) 여전히 애시의 죽음은 사필귀정을 위한 작가님의 에고라는 느낌도 없잖아 있다죠...^^? 그렇지만 애쉬가 에이지와 함께하는 엔딩이었다면 저를 포함한 그 많은 사람들이 평생 이 만화를 기억했을까요 영혼에 크나큰 상처를 입고... 이 만화는 바나나피쉬가 맞는 듯요 . .
3. 불만 얘기하는 김에 이 세계관에 성적 학대가 조금만 덜 판쳤다면 나았을 거란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작가 설정상 애시는 남녀 가리지 않고 꾀는 치명적요부,남자의넋을빼앗는서큐버스,은교여시 이기에 어쩔 수 없는 거겠죠? (1985~1994년 연재된 시대적 배경을 참작하려 노력합시다)
4. '바나나피쉬'라는 명칭은 샐린저의 <바나나피쉬를 위한 완벽한 날>을 모티브로 합니다. 시모어라는 2차대전 참전군인은 PTSD에 가깝게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고 말해지)는데요. 시모어는 부인과 플로리다 해변으로 떠나고, 그 해변에서 시모어는 해변에서 만난 아이에게 '바나나 피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바나나피쉬는 어떤 구멍 안에서 수많은 바나나를 먹어치우고 뚱뚱해져서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되며, 바나나 열병에 걸려 죽게 된다는 이야기지요. 이후 돌아가려는 시모어에게 아이는 자신이 바나나피쉬를 방금 한 마리 본 것 같다고 하는데, 그날 밤 시모어는 호텔 방에서 잠든 부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권총 자살을 한다. 이 어리석은 자기파괴적 물고기는 바나나를 먹으면 파멸로 이르는 것을 알면서 먹고 스스로를 죽여버렸습니다. 애시가 바나나피쉬라면 에이지는 구멍 속의 바나나였다고도 할 수 있을지... 애시도, 주변인도 에이지를 곁에 두는 것은 위험하다고 했지만 결국 영혼의 가장 근본적인 형태로 애시는 에이지와 함께하기로 결정했으니까요.
5. 원작을 보신 분들 중 아직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으신 분들도 계실 것 같아요. 원작 팬들도 다들 고퀄이라고 만족할 정도로 멋지고, 에피소드마다 달린 영미문학 기반 소제목이 매우 흥미로우니 감상을 추천합니다. (진짜 찰떡같아서 원작 에피소드 제목인 줄 알았어요) 물론 나무위키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각 화의 전율이 최고조의 달한 장면에서 맞춘 듯이 나오는 제목을 보고 소리지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ㅎ ㅎ
어나더까지 읽자마자 벅차올라 두서없이 쓴 알못의 글인데 읽어주셨다면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