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있었던 일을 써볼까. 생생히 기억날 때 산채로 잡아 퍼뜩 옮겨 적어야 한다. 그 순간을 오래도록 살려놓기 위해서. 나는 어제의 일을, 어제의 감정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이전 글에서 밝혔지만 나는 엄마를 원망했다. 본인을 삭제하고 일생을 자식에게 바친 위대한 인간을 원망했다. 오로지 자식 교육을 위해 공무원 신분을 내던져버린 파격적인 인간을 원망했다. 생계를 위해 백화점 옷 대신 지하철 역사에서 파는 중고 옷가지를 휘적거리는 가여운 인간을 원망했다. 친구로부터 짝퉁 가방을 받아와선, 짝퉁인지도 모르고 기뻐하는 살뜰한 인간을 원망했다. 고기반찬을 잔뜩 하곤, 일부러 야채만 집어먹는 갸륵한 인간을 원망했다. 집 나가는 남편을 붙잡지 않고, 작은 몸으로 용감히 두 생명을 책임져 온 영웅과도 같은 인간을 원망했다. 원망할 구석이라곤 눈 씻고 찾아도 없는, 한없이 사랑과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인간을 원망했다.
그 무엇도 엄마 때문이 아닌 것을. 아빠를 원망하기에는 성인 남자의 해코지가 무서워, 아빠 대신 엄마를 원망했다. 평범한 환경에서 자라지 못한 것을 원망했다. 더 좋은 것을 입고 먹지 못한 것을 원망했다. 더 좋은 환경에서 나는 더 화려한 나비가 될 수 있었을 거라고 책임을 전가했다. 그 희생으로 할 수 있는 게 고작 이것이냐고 나를 살려낸 인간의 목을 졸랐다.
엄마는 자식의 원망에 대처하는 연습을 오랫동안 해왔던 것처럼, 나의 원망을 수월하게 받아들였다. 차라리 '널 어떻게 키웠는데 나를 원망할 수 있니?' 하고 반발했다면 원망이 쉬이 사그라졌을까.
"그래. 아무래도 엄마가 널 속상하게 한 게 있겠지.
엄마도 하루하루 살아내느라 정신이 없었어. 나도 모르게 상처 주어서 미안하다.
속에 담아두지 말고, 엄마 원망해서 마음이 풀린다면 그렇게 해.
네 마음 편한 게 제일이야."
엄마란 이런 것인가.
온몸 다 바쳐 두 생명을 키워내고도 원망의 눈초리를 받아야 하는 것. 원망의 눈초리에 당당하게 맞서지도 못하는 것. 본인을 없애 자식을 살리는 것. 일말의 반격도 없이 원망을 포용할 수 있는 것.
자식이란 이런 것인가.
원망을 짓고 탓하는 것. 받은 것에 감사하기보다 받지 못한 것을 응징하는 것. 한없는 희생을 요구하면서도 그 희생을 딱하게 여기는 것.
엄마의 손쉬운 수긍은 오히려 내 심사를 뒤틀리게 했다. 내가 한 고생이 얼만데, 이렇게 쉽게 용서를 구한다고? 정당성을 얻어버린 내 원망은 분노한다. 건드릴 구석이 없는 고결한 그녀의 희생에 손을 댄다. 그녀의 희생을 위대한 것에서 딱한 것으로 변모시킨다. 박수받아 마땅한 삶이 아니라, 본인을 잃은 삶. 자식만 바라보고 사는 따분한 삶. 그래서 결코 닮고 싶지 않은 삶. 어제는 희생에 대한 조롱이 선을 넘어버렸다.
"나는 엄마를 보니까, 자식을 더 못 낳겠어.
엄마가 우리에게 희생하는 것만큼, 내 자식한테 할 자신이 없어.
그 희생이 위대한 건 알겠는데,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아.
엄마처럼 '내'가 사라진 인생을 살 자신이 없어."
그러면서 같잖은 조언을 덧붙였다.
"내가 자식을 낳기를 바란다면,
스스로의 삶을 사는 모습을 보여줘 봐.
나도 보고 배우는 게 있어야지.
엄마가 되어도 본인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내가 느낄 수 있게. "
안 그래도 벅찬 엄마에게. 엄마만으로 벅차고 아빠 역할까지 하느라 죽겠는데 딸내미 원망까지 들어야 하는 엄마에게, 희생 이외의 또 하나의 임무를 부여한다. 엄마 말고 나. 나를 위해서 엄마의 삶을 즐겨달라고. 해방을 가장한 희생을 요구한다. 엄마는 이제 본인 인생을 '즐기는' 모습까지 보여주어야 한다.
무차별 폭격과 같은 망언을 쏟아내고 몇 분 후. 열린 방 문 사이로 엄마의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들려온다. 딸내미와 한바탕 하고 나서 노래를 부른다고? 독자분들은 또 한 번 속이 뒤집어져 씩씩대는 내 모습을 상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씩씩대기는커녕, 코가 시큰하고 눈물이 차올라 죽는 줄 알았다. 엄마는 그새 싸인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부자연스러운 연기일지라도 기꺼이 임무를 완수하고 있는 것이다. 엄마는 인생을 즐기고 있다는 암호. 노랫소리로 암시하는 메시지. 엄마는 희생하는 이 생이 슬프지 않다고. 희생함으로써 기쁘다고. 이 행복을 너희가 아느냐고. 이 콧노래를 들으면서도 정말 모르겠냐고. 흠~ 흠흠~ 희생으로 점철된 인생은 도무지 희생을 잠재울 줄을 모른다. 나를 위해 인생을 즐겨달라는 말에 단번에 인생을 즐겨주는 클래스. 본인이 어떻던 자식이 원한다면 오케이. 그 희생정신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남은 엄마 생에 한 번쯤은 자식을 등지고 마음껏 엄마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오로지 엄마만을 생각해 결정을 내리는 것들도 있었으면 좋겠다. 자식을 내몬 인생길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려봤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그 고귀한 희생 탓에, 나의 소망들을 강요할 수가 없다. 정말로 희생하는 삶이 엄마에게 온전한 기쁨이라면. 고되어도 자식의 일거수일투족을 신경 쓰는 것이 차라리 행복이라면. 자식을 내모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아픔이라면. 희생하는 삶이 엄마에게 형벌이 아니라 복福이라면. 정말로 그렇다면... 엄마의 이해되지 않는 '행복한 희생'을 이제는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해도 아직은 그녀의 '행복한 희생'을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녀는 여전히 나에게 위대하고도 딱한 여인이다. 내게도 몸 불살라 키워낸, 나보다 소중한 존재가 생겼을 때에 그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까. 그때에 도달해 마침내 암호를 풀어내더라도 나는 기쁘기보다 서글플 것이다. 어제의 내가 그녀를 찌른 말이 시공간을 뚫고 나를 찌를 것이기 때문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나는 콧노래를 불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더라도 나는 그녀의 아픔을 반만큼도 체감하지 못하리라.
엄마를 보니까, 나는 엄마 못 하겠어.
나는 엄마 같은 엄마가 못 될 거 같아.
사실은 나 같은 딸 낳을까 봐...
나는 정말 엄마 못 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