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서보다 큰 감동, 변시지의 작품
밤 9시 30분. 9살 똘래미(제주어로 딸)가 수학 수업을 마치자마자 엉엉 울며 안겼습니다. 원래 90분 진행되는 온라인 수업이 30분을 더 넘겨 끝났기 때문입니다. 시간 내에 주어진 문제를 풀지 못한 최후의 3명이 모인 '나머지 수업'이니 뭐, 본인이 할 말은 없겠지만요.
수학을 가장 어려워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엄마의 입장에서는 안쓰러우면서도 '이게 울기까지 할 일인가...?' 싶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잖아요, 살아가며 얼마나 시련이 많은지. 그러나 9살 어린이에게는 충분히 그럴 수 있을거라 애써 이해하며 다독여 주었습니다.
제가 살아가며 힘들 때마다 되뇌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생즉고'인데요. 저는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이 말처럼 삶을 간단하게 아우르는 단어는 찾지 못했어요. 생즉고, 즉 인생은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고 다음 단계로 내디딜 수 있는 작은 힘이 되어주더라고요.
자기계발서보다 큰 감동, 변시지의 작품
변시지 작품을 그런 의미에서 소개해 봅니다. 고 변시지 작가는 제주 화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가로 평가받습니다. 인생의 방황과 시련, 그리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한눈에 나타내는 그림이 주를 이루는데요. 바로 이 부분이 제겐 자기계발서보다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우성(宇城) 변시지 화백은 1926년 제주에서 태어나 1931년 열 살도 되기 전에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1942년부터 오사카 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공부했지요. 일본의 서양화 단체인 ‘광풍회’ 전시회에서 입선하고, 제34회전에서는 최고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1957년 한국으로 돌아와 여러 전시에 참여하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등으로 육지에서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이후 1975년 44년 만에 고향 제주로 돌아와 제주대학교 미술교육과에서 재직하며 여생을 제주를 중심으로 작업했답니다.
일본에서 활동할 때의 변시지는 주로 인물화를 그렸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고궁(古宮)을 소재로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지요. 1970년대에 제주도에 정착하며 1977년부터 비로소 제주의 풍경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절의 제주가 품고 있던 향토적인 정경을 고스란히 화폭에 옮기며 우리가 익숙한 '변시지 스타일'이 탄생했습니다.
변시지 화백의 제주 시기 작품에서는 태양, 바다, 소나무, 수평선에 걸친 조각배, 태풍이 불어 언제라도 쓰러질 듯한 해변, 초가집, 돌담, 조랑말 등의 지역 정서가 물씬 풍기는 소재들이 주인공입니다. 황갈색이 가득한 화면에 검고 굵은 선으로 형태를 간략하게 표현하며 독보적인 개성을 자랑하지요. 이번 글에서는 색과 선,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정신을 골고루 살펴 보겠습니다.
변시지의 색
황톳빛. 그의 그림을 바라보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닿는 심상입니다. 제주 시기의 작품에서 그는 시종일관 황색조의 단색 톤을 유지하는데요. 지나치게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빛깔 때문일까요, 아니면 심심한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 탓일까요? 거의 오브제가 한두 개밖에 그려져 있지 않은 탓인지... 제게는 황톳빛에 잠겨있는 이들이 외롭고 쓸쓸하게 다가옵니다.
변시지의 선
갈필 그리고 여백. 넉넉한, 혹은 채워져 있어도 넉넉해 보이는 여백은 검정색으로 통일된 특유의 선적인 표현에서 유래됩니다. 선으로만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그 안에 숨겨진 공간이 한눈에 드러나는 것이지요. 이 강한 필치는 서양화보다는 동양화를 연상시키며 제주의 원형을 작가 고유의 스타일로 담아냅니다.
변시지의 정신
이처럼 그의 그림에 푹 빠져있다 정신을 차리면 잠시 다른 세상에 다녀온 기분입니다. 한 명의 화가가 재해석한 제주의 자연 풍경은 가장 제주다우면서도 또 다른 세계인듯 새롭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때론 폭풍우가 휘몰아칩니다. 예측했든 하지 못했듯, 폭풍은 가혹합니다. 그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겨우 지팡이를 쥐고 있을 뿐입니다. 마치 변시지 작품 속 인물처럼 말이지요.
신기하게도 그의 작품에선 장면 속 분위기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편평한 2차원 화면에서 휘몰아치는 바람과 흙 내음 등의 공감각적 심상을 느낄 수 있다니요! 역동적인 붓터치와 필치, 그리고 작가가 담은 정신으로 강인한 생명력이 넘치는 작품을 통해 우리는 사람이 살아가며 느끼는 고독과 이상향을 향한 수도자의 자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제주화'로 일컬어지는 변시지 화백의 작품 양식은 결코 한 번에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다양한 스타일을 거쳐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정립하게 된 것이지요. 그의 화풍은 굵직하게 ‘일본 시기(1931~1957)’ ‘서울 시기(1957~1975)’ ‘제주 시기(1975~2013)’로 구분됩니다. 일본 시기에는 서양 근대미술을 익히며 배웠고, 서울 시기에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했지요. 그리고 제주 시기에 이르러 누구나 "아, 이건 변시지 작품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만의 예술관을 정립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과정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삶은 '생즉고'입니다. 변시지 작가 또한 식민국 예술가로서 안고 있던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문화예술을 여러 땅에서 자유롭게 체험한 덕에 아카데믹한 제도권 미술에 얽매이지 않은 자신만의 표현을 창조할 수 있었지요.
그는 일본과 한국 사이에서 스스로를 유목민으로 느꼈던 마음을 다잡고, 마침내 자신만의 황토색 꽃과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리도 변시지 화백처럼 살아보기로 해요. 때론 저의 9살 딸아이처럼 엉엉 울고 싶은 순간도 있을 것이고, 하루에 '생즉고'를 300번 정도 되새기는 날도 생길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쩌겠어요, 슥슥 털고 일어나 열심히 살아야지요. 3년 전 제가 아산 신정호 근처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을 상상하지 못했듯, 삶은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다줄것입니다. 변시지 작품 속 인물의 지팡이처럼, 항해하는 배의 키는 내가 쥐고 있습니다.
앞에 놓인 인생에 안개가 자욱했을 때, 자기계발서가 더 나은 삶으로 이끄는 한 줄기 동앗줄인 양 매달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최근 자기계발서의 효용에 대해 온라인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며 무조건적인 맹신이 걷히는 조짐이 보이는데요.
저는 앞으로 자기계발서를 읽고 싶을 때마다 변시지의 그림을 보려고 합니다. 핸드폰 즐겨찾기 앨범에 담긴 거적을 두르고 지팡이를 든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보면, 작품 속 인물에게 감정이 이입되는 것은 물론 몇 십 년 동안 꾸준히 그림을 그려온 변시지 화백에 대한 존경심으로 다시 생에 대한 의지가 불끈 솟아오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자기계발서를 읽고 싶을 때 앞으로 그림을 통해 글자보다 더 직관적으로, 더 빠른 시간에 에너지를 받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앎과 삶의 일치, 즉 생활 속으로 시각예술을 끌어당기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제주를 떠나와서도 종종 떠올렸던 그의 그림을 이번 주제로 정하고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최근 제주현대미술관에서 작고 10주기 기념으로 올해 2월까지 개인전을 열었더라고요. 공공수장고의 미디어 전시와 함께 말이지요. 이미 관람한 분들, 참 부럽습니다.
이 전시가 아니더라도 제주도민이라면 한 번쯤 변시지 작가의 그림을 만나본 적이 있을텐데요. 서귀포 기당미술관에서 그의 상설 전시 <폭풍의 화가, 변시지>를 만나볼 수 있고 한편에 마련된 재현 작업실도 있으니 이번 글을 읽은 분이라면 다녀와보기를 권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