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4
헤르만 헤세 - [데미안]
[죄와 벌]을 읽고 나니, 세계 문학에 좀 더 흥미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갖고 있는 책 중에 가벼워 보이는 작품 먼저 읽어보려고 했습니다. 이번엔 독일의 대문호인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입니다. 예전에는 그저 얇다는 점에 끌려서 샀다가 100여 페이지 보고 덮어버렸어요. 이마저도 며칠 걸려서 읽은 분량입니다. 밑줄의 흔적이 없는 걸 보니, 특별히 사유하면서 읽기보다는 눈으로 활자만 좇아 마침표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한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기억에 거의 남지도 않고, 무얼 말하려는 지 이해도 되질 않아 재미가 없었던 게 아닌가 해요.
오늘은 이 책을 다시 집어 각 잡고 읽었어요. 흥미로운 점에는 밑줄도 긋고, 아리송한 부분은 잠시 멈춰서 붙잡고 늘어져도 보고요. 그랬더니 전에는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던 내용들이 정리되어 들어오고, 벌써 이전에 읽다가 멈춘 페이지까지 거의 도달했습니다. 첫인상과는 다르게 상당히 흥미로운 성장 소설이더군요. 역시, 독서는 단순히 문장을 읽는 것이 아닌, 그 뒤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사유하는 행위인가 봅니다.
어제와 오늘은 책 읽은 시간이 많았지만, 이제 내일부터는 다시 일에 치이겠군요. 우리네 인생 파이팅입니다.
아래에는 책의 일부분을 인용하여,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 7p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일회적이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 8p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 9p
★헤세는 개인의 세계를 강조하고 있다. 소설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해서, 심지어는 어떤 부분에서는 문학보다는 철학서와 같은 생각을 내비친다.
-1. 두 세계-
'나는 밝고 올바른 세계에 속했다. 나는 내 부모님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내가 눈과 귀를 향하는 곳 어디에나 다른 것이 있었다. 나는 다른 것들 속에서도 살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내게는 자주 낯설고 무시무시했고, 그곳에서는 규칙적으로 양심의 가책과 불안을 얻을지라도. 심지어 한동안 내가 가장 살고 싶어 한 곳은 금지된 세계 안이었다.' - 13p
★가족과 가정으로 보호받는 공간은 밝고 경쾌하고 올바른 세계, 그러나 그 외의 금지된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떨칠 수 없다. 유년기의 싱클레어가 바라본 세계이다.
'내 유년 생활을 떠받치고 있는, 그리고 누구든 자신이 되기 전에 깨뜨려야 하는 큰 기둥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다.' - 26p
★정신의 성장은 곧 이전의 세계를 깨뜨리는 행위와 같다. 이는 좀처럼 평화롭지 않고, 상처와 불안, 고통을 선사하기도 한다.
-2. 카인-
'「사람들은 카인의 자손들이 무서웠어. 그들은 <표적> 하나를 가지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 표적을, 그것의 원래 모습인 우월함에 대한 표창으로 설명하지 않고, 반대로 설명한 거야. 사람들은 말했지, 이 표적을 가진 녀석들은 무시무시하다고, 또 그들이 실제로 그렇기도 했어. 용기와 나름의 개성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한테 늘 몹시 무시무시하거든.」' - 41p
★막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갑자기 등장한 혼란을 주는, 그러나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 나이 또래 치고는 조숙한, 아니 실제로는 영겁의 세월을 살아온 것만 같이 기존의 틀을 뒤흔드는 신비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어른들의 카인과 아벨에 대한 해석과 같이 카인이 악인인 것이라기보다는, 우월하고 두려운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때 나는 카인이었고, 그의 표적을 달았던 나는 이 표적은 치욕이 아니라고, 이건 표창이라고 함부로 상상했다. 악의와 불행을 겪었기 때문에 내가 우리 아버지보다 더 높은 곳에, 선하고 경건한 사람들보다 더 높은 곳에 서 있다고.' - 44p
★정신적 성숙과 독립을 완성해가고 있는 청소년들이 이 소설을 읽으면 바로 이런 대목에서 무언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죄와 벌]에서 라스콜니코프가 스스로 나폴레옹의 권력 사상에 빙의했듯이, 그리고 이 소설에서 싱클레어가 스스로 카인이라고 믿듯이, 수많은 범인(凡人)들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느끼곤 한다. 이를 중2병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 없어.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면, 그건 그 누군가에게 자기 자신을 지배할 힘을 내주었다는 것에서 비롯하는 거야.」' - 52p
★상대방에 대한 두려움은 자신에 대한 지배권을 넘기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데미안.
'사실 그것은 두려움 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데미안이 부모님보다 더 많은 것을, 훨씬 더 많은 것을, 나로부터 요구했을 테니까. 그는 충동과 경고로, 조롱과 반어로 나를 보다 자립적으로 만들려고 했을 테니까. 아, 지금은 알고 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인도하는 길을 가는 것보다 더 인간에게 거슬리는 것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 62p
★어린 싱클레어는 데미안에 의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생각을 얻게 되고, 결국 가족으로부터 자립적으로 변하여 자아를 발견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어린 나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정신적 성숙의 과정은 결코 편안하지만은 않으니까.
-3.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
'내 의식은 집안의 허용된 세계 속에 살았으며 어렴풋이 솟아오르는 새로운 세계는 부정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꿈, 충동, 은밀한 소망들 속에서 살았다. 그 위에서 저 의식적 삶이 만드는 다리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내 소에서 유년의 세계가 붕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 65p
★사춘기 소년이 된 싱클레어는 유년의 세계의 붕괴를 직감하고, 금지된 세계에 속하다고 믿는 성에 눈에 뜬다.
'묘한 이야기, 이상한 격언을 나에게 시사해 주는 데에는 내 짝의 눈길 하나면 충분하였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서 비판이나 회의를 일깨우기 위하여 나를 경고하는 데에는 그의 다른 시선 하나, 아주 단호한 눈길 하나면 충분했다.' - 72p
★1년 전 일 이후로, 싱클레어는 자신도 모르게 데미안에게 정신적으로 이끌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걸 수행하거나 충분히 강하게 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소망이 내 자신의 마음속에 온전히 들어 있을 때, 정말로 내 본질이 완전히 그것으로 채워져 있을 때뿐이야. 그런 경우가 되기만 하면, 내면으로부터 너에게 명령되는 무엇인가를 네가 해보기만 하면, 그럴 때는 좋은 말에 마구를 매듯 네 온 의지를 팽팽히 펼 수 있어.」' - 77p
★진정한 자유 의지가 있다기보다는, 의지와 뜻이 좁은 테두리에 매여 있는 것이고, 그것을 벗어나 의지를 내 것처럼 휘두를 수 있으려면, 그 행위에 대한 소망이 충만한 상태여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이 온전한 유일신, 오랜, 그리고 새로운 맹약의 신이 탁월한 분이기는 하지만 원래 그가 표상하는 그런 신은 아니라는 점이야. 그는 선, 고귀함, 아버지다움, 아름답고도 드높은 것, 감상적인 것이지. 옳아! 그러나 세계는 다른 것으로도 이루어져 있어. 그런데 다른 건 죄다 그냥 악마한테로 미루어지는 거야. 세계의 이 다른 부분이 통째로, 이 절반이 통째로 숨겨지고 묵살되는 거야.」' - 83p
★선과 악 이분법적인 접근은 세상을 바라보는 데 그리 훌륭한 방법은 아니다. 좋다고 여겨지는 가치들 외에 일반적이거나 터부시 되는, 소위 금지된 세계에 속하는 성과 같은 것들이 악이라면, 악마도 숭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통찰은 즐겁지 않았다. 확인해 주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었는데도 왠지 즐겁질 않았다. 그 통찰은 가혹했다. 맛이 떫었다. 그 안에는 일말의 책임의식이, 이제는 어린애일 수 없다는, 홀로 서 있다는 울림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 84p
★그렇게 외면하던, 어른으로 가는 길에 들어선 싱클레어.
'「그러니까 우리들 누구나 자기 스스로 찾아내야 해,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어 있는지――자기에게 금지되어 있는지. 금지된 것은 결코 할 수 없어. 금지된 것을 하면 대단한 악당이 될 수 있지. 거꾸로, 악당이라야 금지된 일을 할 수 있기도 하고 말이야.――사실 그것은 그냥 편안함의 문제거든! 지나치게 편안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자신의 판결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금지된 것 속으로 그냥 순응해 들어가지.」' - 86p
★금지된 것에 대한 기준을 개인 스스로가 세워야 한다는 의견. 사회통념이나 어른들, 남들의 잣대에 휘둘릴 것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