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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Aug 18. 2021

방황하는 이의 편지

땅굴만 파던 취준생 시절, 멘토였던 전 팀장님께

차장님 안녕하세요

무더위에 강녕하신지..라고 묻고 싶지만 캐나다는 날씨가 좋아서 여름이 가는 걸 아쉬워하신다니 부럽고 부러울 따름.. 요즘 이런저런 생각도 많고 차장님 생각도 많이 나고 대화가 아닌 고해성사하는 기분으로 이야기하고 싶어서 메일을 드립니다. 편지를 쓸까 했는데 너무 의식의 흐름이 될까 봐 메일을 열었어요.   


사람이 가장 스스로가 쭈구리라고 느껴진다는 취준생.. 백수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다는 건 지난 통화에서 느끼셨겠지만 최근에 제가 깨달은 바가 있어서 차장님이랑 이야기하고 싶어서? 차장님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서 메일을 써요.  


지금 영어 스터디를 하나 하고 있는데, 이 스터디 리더 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음번에는 한 단계 위로 올라가도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초급에서 중급으로)

저는 헉 아니다.. 나는 내 실력 잘 안다.. 난 기초가 더 필요하다..라고 이야기했었는데 그 리더는 아니라고 하더라고요.(립서비스는 아닌 거 같았음)

그리고 저는 지금 학생 때 배웠던 기초영어 인강을 신청한 상태인데요.  

이 시점에서 문득 깨달은 게, 저는 자꾸만 비기너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거였어요.


영어 스터디는 그냥 그것을 깨달은 계기일 뿐, 생각해보면

전 회사에 다시 돌아와라! 하시던(농담 반 진담 반의) 상무님의 말씀에 그 기대를 부응할 자신이 없다. 차장님 밑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일했던 거였지 가면 실망시킬 거 같다.. 고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저는 디자인을 하면 할수록 '나랑 맞지 않는 거 같아.. 진짜 디자인 못하네'라는 것을 많이 느끼는데 그래서 쌓인 저의 커리어(포폴)도 부족하고 부족해 보여요. 최근에는 진짜 디자인이 아닌 다른 분야 공부를 새로 시작해볼까..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아마 연속된 낙방이 큰 원인이겠지만)


수영 반도 더 높은 반으로 올라갈 수 있지만 고만고만하게 제가 할 수 있는 반에서 버티고 있고

그래도 경력이란 게 쌓였는데 저는 아직도 제 위의 사람의 필요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프로로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질 않아요.

초년생 때만 이런 생각을 하겠지. 경력 쌓이면 자신감 붙겠지 했는데 아닌 것 같아요.

하면 할수록 부족함을 너무 느껴요. 아닌 것 같아서 자꾸 비기너로, 처음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것을 최근에 깨달았어요. 해도 해도 부족함을 느껴요. 이건 겸손의 개념이 아니에요. 잘 못하니까 당연히 부족하다고 따라오는 것인 거 같아요.  


왜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는지, 언제부터인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기억나는 처음은 서울에 올라오는 것 자체부터였던 것 같아요. 서울에 올라와서 적응 못할 거 같았고 무서웠고..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여하튼 그것은 극복했죠. 잘 해냈는데 그 이후로도 제가 걱정하던 것보다 저는 다 잘 해왔다고 생각해요. 당장 손꼽아가며 생각해봐도 일하면서 칭찬받은 일, 해낸 일이 더 많은걸요. 그런데 저는 왜 이렇게 그다음 스텝으로 발 떼기가 힘든 걸까요.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내가 다음 스텝을 겁내는 것은 '실망할까 봐'인 걸까?

'넌 잘할 거야'라고 지켜봐 주는 사람들이 '까 보니 아니네'라고 말하는 것이 무서운 것인지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못해버리면 스스로한테 실망하고 상처 입을까 봐 피하는 것인지.


사람들이 제게 거는 기대만큼 제가 충족을 못할 것 같으니까 아예 시도도 안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럼 나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가 그렇게 중요했나? 그것을 의식했었나?


그건 또 아닌 것 같거든요.

제가 했던 행동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았었어요. 제가 느끼고 행하고 싶은 만큼 했던 것 같은데 그걸 좋게 봐주신 거겠죠. 근데 거기에서 갭 차이를 훨씬 많이 느끼나 봐요.

스스로 '나는 언젠가 당신을 실망시키게 될 겁니다'라는 것이 깔려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차장님 생각이 많이 나던 이유가 바로 이 지점인데요.

차장님을 제외한 저한테 '너 잘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저의 동료, 상사, 친구들은 저한테 속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가진 능력보다, 제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잘 봐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요.

제가 한 일들에 대해 칭찬해주면 '보는 눈이 없군!'이라는 생각까지도 들거든요.


생각해보면 저는 제가 한 일들에 대해 제가 느끼기에 과한 칭찬과 인정만 받아오다가 차장님을 뵙고, 차장님이랑 같이 일하면서 배우면서 발가벗겨진 기분을 많이 느꼈어요. 진짜 제 실력을 다 알아챈 분.이라는 생각을 처음 했었거든요. 그래서 더 많이 배우고 싶었고 더 오래 일하고 싶었었나 봐요. 그리고 저는 그것이 좋았었어요. 저의 부족함을 아는 분과 일하는 것이요. 다른 사람들은 저라는 사람에 대해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차장님은 제가 아는 저라는 사람에 대해 가장 많이, 적나라하게 아시는 분 중 한 분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차장님, 저는 왜 자꾸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을까요. 왜 자꾸 비기너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요.

제 자신은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꾸며진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왜 사람들이 보는 저를 부정하려고 할까요. 부정하고 싶을까요. 결국 저도 '너 잘하고 있어. 좋은 사람이야'이런 말을 듣고 싶어서 이러는 걸까요..?

이모티콘 잘 만들잖아 이모티콘 해봐- 라는 말에는 '이 바닥이니까 잘한다는 소리 듣지. 그 바닥에 가면 난 아무것도 아닌걸'이라고 생각하고 너 재밌는 사람이니까 이런 거 저런 거 해봐- 라는 말에도 '그 바닥에 가면 난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생각하고  뭔가 되게 열심히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아요.

다 고만고만하게 고만고만한 일들만 한 것 같아요. 그래 놓고서 낙방하면 우울해하는 게 싫고 힘들어요.

많은 사람들 중 우수한 사람을 뽑는 거니까 고만고만한 저는 당연히 떨어지는 것인데 인정하려들지 않는 것 같아요.


어딜 가든 또 어떻게든 잘하겠지-하면서도 거절당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 같아 그게 우울한 것 같아요. 저를 좋아하는, 지지하는 응원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데 저를 처음 본 면접관이 거절한 것으로 이렇게 멘탈 자체가 흔들리는 것이 싫고 그래요..  


스스로 자존감이 되게 높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럴 때 보면 아닌 것 같고..

원래 사람이란 게 어떤 상황에 쳐해 있느냐에 따라 작아졌다 커졌다 하는 거지만

저는 지금이 비로소 발가벗겨진 저를 마주하는 것 같아서 그게 괴로운 거 같아요.  


예전에는 이런 고민이 생기면 어떻게든 몇 날 며칠이든 고민해서 제 나름의 정리를 하고 주변에 '힘들었지만 괜찮아'라고 과거형으로 이야기하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졌어요.

그리고 어제, 제 친구 중에 늘 자유롭고 자신감 넘쳐 보이는 친구에게 이런 요즘 심정을 털어놓았었는데

취준생 때는 누구든 마음이 다 쭈그러드는 것 같다. 자신도 그랬는걸.이라는 말에 위로가 되기도 하더라고요

(얘는 별로 이런 일에 타격 안 받을 거 같아서 공감 못해줄 줄 알았거든요)


모두가 불안을 안고 살아갈 텐데 다들 어떻게 해결하는 걸까. 사람들이 보는 나와 내가 느끼는 나의 갭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는 걸까. 등등의.. 이런 이야기를 꺼내고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글이 길어졌어요 차장님.

머릿속에 부유하고 있는 생각들을 정리하려고 혼자 메모장 켜놓고 의식의 흐름대로 두 번 정도 장문의 아무 말을 늘어놓은 다음에야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씀드려보았어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누구한테 할 수 있을까.. 에 차장님이 계세요.

차장님, 저는 지금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걸까요..


> 그리고 이틀 뒤 온 차장님의 답장
https://brunch.co.kr/@kamari/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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