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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go Oct 28. 2021

나의 반나절이 사라졌다

디지털 기록 소실의 허탈함

직장생활이 30년을 넘어가고 있지만 금요일은 금요일인지라 오후가 되면 일이 착착 감기지 않고 겉돌기 시작한다. 때마침 하늘에서 굉음을 일으키며 비행기의 에어쇼가 시작되었다. 점심을 후딱 해치우고  회사 건물 옥상에 올라가 성남 서울비행장에서 하는 에어쇼를 촬영했다. 어제는 같은 시간에 하늘을 수놓은 멋진 비행기를 바라보는 내 손에 핸드폰이 딸랑 들려 있었는데, 오늘은 풀프레임 카메라에 200밀리 망원 렌즈를 물려서 비장한 마음으로 머리 위로 선회비행을 하는 전투기를 향해 연신 셔터를 눌렀다. 



하늘로 솟구쳐다가 급강하하는 비행기의 곡예

강한 햇빛 아래서 찍은 사진을 확인하는 것은 어차피 부질없는 짓인지라 사무실로 내려와 과연 몇 장의 사진을 건졌는지 확인하였다. 몇 장을 추려 간단히 후보정을 하고 동료들에게 카톡으로 전송하고 나서 드디어 일이 터졌다. 


멀쩡하던 노트북 화면이 블루 컬러로 바뀌더니 파일 관리자에서 D드라이브가 뿅 하고 사라져서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D드라이브는 내가 작업하고 있는 모든 정보를 기록하는 곳이기 때문에 아찔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네이버 클라우드로 실시간 백업을 하고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실시간'이라는 것이 실제 시간과 반나절 정도 차이가 벌어져있었다. 




즉, 나의 금요일 오전 디지털 기록은 세상에서 종적을 감춘 것이다. 금요일 오후 증후군, 안단테에서 아다지오 빠르기로 느려진 생각의 속도를 이겨내며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던 내 보고서가 오전 9시 16분까지만 백업이 되어 있었다. 사라진 디지털 기록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  우리는 현실세계에 살고 있지만 또한 가상세계에 우리를 투영시켜 그것을 바라보기도 한다. 마치 내가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인 된 것처럼 말이다. 

실제는 한 시간을 걸었지만 아차 하고 휴대폰을 놓고 오천보를 걷고 돌아와서 휴대폰의 삼천보만 찍혀 있는 만보기 앱을 바라보면 왠지 마음이 허전하다.

디지털에 싱크 되어 있지 않은 걷기 운동이 나에게 반쪽짜리 경험이 되어버린지는 이미 한참 전이다. 


실제 생활만큼 더 중요한 세상이 되어 버린 가상 세계의 '나'를 실제의 내가 안쓰러워하는 거다. 오천보를 걷고 왔지만 운동을 제대로 못한 가상의 '나'를 보며 정말 운동을 하지 않은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드는 거다.   


호접지몽()과 다를 게 없다.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인가?를 구별하기 힘든 지경이 되어 가고 있다.


사라진 나의 금요일 오전의 기록들, 수많은 문장들을 똑같이 다시 써 내려가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마치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들을 싹 다 지우고 기억에 의존해 다시 쓰는 일이 불가능한 것과 같다. 


하지만 다시 쓰면서 조금 더 새로운 생각이 더해지고 또 다른 결과물이 생겨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반나절 이상의 갭이 벌어지지 않게 백업 시스템이 잘 기록하고 있기에 안심하고 미러링 되는 디지털 활동을, 가상세계에 기록되는 현실의 활동을 해 나간다. 


사실 이렇게 생각하려 노력하지만.... 내 삶의 기록이 언젠가 한방에 날아갈지 모르는 가상세계와 싱크 되어야 마음이 편하다. 이러다 현실의 내가 늙고 소멸되면 홀로 남아있을 수많은 나의 디지털 기록들을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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