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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Apr 16. 2024

먼 곳

쉰여섯 번째 시

2022. 5. 25.
문태준, ‘먼 곳'
시집 <먼 곳(창비시선 343)> 중에서


[먼 곳]


오늘은 이별의 말이 공중에 꽉 차 있다

나는 이별의 말을 한움큼, 한움큼, 호흡한다

먼 곳이 생겨난다

나를 조금조금 밀어내며 먼 곳이 생겨난다

새로 돋은 첫 잎과 그 입술과 부끄러워하는 붉은 뺨과 눈웃음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대기는 살얼음판 같은 가슴을 세워들고 내 앞을 지나간다

나목은 다 벗고 다 벗고 바위는 돌 그림자의 먹빛을 거느리고

갈 데 없는 벤치는 종일 누구도 앉힌 적이 없는 몸으로 한곳에 앉아 있다

손은 떨리고 눈언저리는 젖고 말문은 막혔다

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 

먼 곳은 생겨난다

헤아려 내다볼 수 없는 곳





   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 먼 곳은 생겨난다. 

   또 한 문장을 수집합니다. 


   이별은 아주 가까운 사이에나 가능한 일이죠. 가까운 곳이 있기에 먼 곳이 있는 것처럼요. 여간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서는 이별이라는 단어가 쓰일 수 없으니까요. 모르는 사람, 낯선 타인은 나를 배신할 수 없습니다. “Strangers may cheat you, but only brothers or sisters, comrades or colleagues can betray you. In the end, intense and ugly forms of disgust and conflict are part of the price we pay for the pleasures of communal life.” 제 지도교수님(제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외국인!) 책의 앞 문장인데, 좋아해서 외우고 다녔어요. 


   감사하게도 책으로 인연이 닿아 안희연 시인과 가끔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는데요. 한 번은 시인님이 “애정으로 제 시를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를 잘못해서 “애증으로 제 시를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써놓고는 빵 터진 적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건 끈적한 감정, 더 깊은 애정을 갈구하는 거예요."라면서 웃으시더라고요. 그렇죠, 격한 애증으로 시를 읽어본 적은 없는데 그런 시가 생긴다는 것은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일 것 같기는 합니다. 


   애정은 잔잔한 느낌인데 애증에는 이를 뛰어넘는 진하고 끈끈한 감촉, 격렬한 파동 같은 게 있죠. 과연 애증으로 읽는 시가 생길까 싶어 생각해 보니 그 역시도 시를 오래 읽고 애정이 한층 깊어져야 가능한 일이겠다 싶습니다. 매사에 무던한 제게도 애증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들은, 시간을 두고 오래 보아온 것 중에서 나오더라고요. 시인은 아직 없지만 철학자 중에는 있는 것처럼.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남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은 이제 이 나이가 되고 보니 꽤 흥미로운 일인데요. 맑고 깨끗하게 흔적이 지워지는 수용성 사랑도 있고, 잘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괴롭히고 문지르다 너저분해지고야 마는 지용성 사랑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 어느 쪽이 좋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겠고요. 어쨌든 사랑의 시작보다 중요한 건 그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맺어야 할 때 잘 끝맺는 일일 텐데요. (제가 했던 연애들의 끝을 돌아보자니 골고루 한숨이...)  


   그런 의미에서, 시에서 보이는 이런 진한 사랑 뒤의 아린 이별은 어떻게 보면 축복이네요. 특히 이렇듯 애틋하고 안전해 보이는 이별이란 귀하죠. 이렇게 고요히 이별의 말을 한 움큼, 한 움큼 호흡하는 그런 이별, 나를 조금조금 밀어내며 먼 곳이 생겨나는 그런 이별은 당사자는 고통스러워도 가만히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해요. 


  시를 읽으면서 아주 오랜만에 이별의 그 진하게 떨리는 공기를 호흡해 봤습니다. 시는 이렇게 우리를 아주 낯선 시공간 안에 쏙 밀어 넣는 능력이 탁월해서 좋아요. 화선지에 먹물 번지듯 서서히 우리를 젖어들게 하는 것이 소설이라면, 시는 단숨에 우리를 물에다 퐁당 빠뜨린다고 할까요. 저는 일순간 제 시공간을 훅 침범해 들어오는 그 난데없고 낯선 힘을 좋아합니다. 


   사랑을 시작할 때는 우리가 얼마나 닮았는지에 환호하고, 이별을 시작할 때는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에 놀라게 되지요. 우리는 그냥 우리였는데도. 아니 너는 너, 나는 나였는데도. 


   오늘도 어딘가에서는 먼 곳이 생겨나고 있겠지요. 세상의 모든 이별을 (야심차기도 하지) 쓰다듬어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먼 곳이 생겨나기에 우리의 지도는 넓어지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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