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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돌리고 괴롭히는 아이들이 있다면

아렌트 아줌마가

by 이진민

이모네 철학 상담소 5월호 원고 올려둡니다. 쓸 말은 많은데 지면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분량을 줄이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는 원고네요. 다시 읽어보니 역시 답답한 느낌. 그래도 어린이 독자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문장을 고르라면 요걸 꼽겠습니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사람도 생각하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모네 철학 상담소 5월호] 따돌리고 괴롭히는 아이들이 있다면: 아렌트 아줌마가


다른 아이를 따돌리고 괴롭히는 아이들이 있어요. 그런데 보복이 두렵기도 하고,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게 싫어서 눈을 감고 지나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어도 되지 않을까요? 제가 특별히 잘못을 저지르는 건 아니니까요.


오늘은 다소 무겁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따돌림과 괴롭힘 같은 폭력 문제 말이죠. 없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수많은 학교와 교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니까요. 여러분은 이 문제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개인적으로 힘든 경험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됩니다. 2023년 교육부 학교폭력 실태 조사에 따르면, 초중고 학교폭력 중 70퍼센트에 가까운 비율이 초등학교에서 일어났다고 해요. 안전하게 배우고 즐겁게 친구를 사귀어야 할 학교가 폭력에 물들고 있다니 정말 마음이 무겁습니다. 가해자들은 신체적 폭력을 가할 뿐 아니라 돈이나 물건을 빼앗기도 하고, 언어 폭력과 사이버 폭력 등 다양한 방법을 쓴다고 해요. 게다가 가해의 사유를 물어보니 장난이었다거나,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거나, 화풀이나 스트레스 해소였다는 답변이 가장 많더군요. 그 조사 결과를 보고 저는 젓가락으로 암만 잡으려고 해도 안 잡히는 메추리알을 앞에 두었을 때처럼 짜증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네 이놈 얌전히 잡히지 못할까

학교폭력에 관해서는 어떤 철학자가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적절한 인물이 떠올랐어요. 인류의 존엄과 가치가 시험대 위에 오르던 폭력과 야만의 시기. 그 어둠의 시간을 직접 겪어 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어떨까 합니다. 아렌트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었고,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여 정치철학자로 활동했어요. 선과 악, 인간다움과 죄책감 같은 문제에 관해 깊은 고민을 했던 20세기 사상가죠. 쉽게 말하자면 나치 독일이라는 무시무시한 폭력 집단의 괴롭힘을 경험하고, 그들의 만행을 생각의 씨앗으로 삼았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참고로 아렌트는 자신을 철학자라고 부르지 않고 늘 ‘정치이론가’라고 불렀습니다. 인간들을 서로 이어주는 사람, 즉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함께 평화롭게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사람이기에 자기는 정치이론가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정치이론가가 누워서 사진 찍는 일이 흔치 않다 싶은데, 아렌트가 좋아하는 사진작가였다고 합니다. Hannah Arendt(1906–1975) © Fred Stein

20세기는 인류 역사에서 굉장히 놀라운 시기였어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개인의 자유를 말살하는 전체주의라는 야만적 경험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인간은 정말로 악한 존재인가’를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2차 대전 중에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같은 곳에서 일어난 일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악몽이었어요. 어떻게 인간이 다른 인간을 그토록 끔찍하게, 그것도 대량으로 괴롭히고 죽일 수 있었을까요? 이에 관해 깊이 고민한 아렌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인류의 역사상 전쟁은 늘 있어 왔고 사람들은 무수한 고통을 당해왔지만, 20세기의 전체주의가 예전과 달랐던 것 한 가지는 바로 ‘인간성을 파괴하고, 인간 본성 자체를 위기에 처하게 했다는 점’이라고요. 즉, 인간의 ‘자발성’이라는 것을 뿌리 뽑고, 모든 인간을 그저 종소리에 반응하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만들려고 했다는 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합니다.


‘플란다스의 개’는 아는데 ‘파플로프의 개’는 처음 듣는다고요? ‘파블로프의 개’는 이반 파블로프라는 사람이 한 실험에서 유래한 표현이에요. 종을 치면서 개에게 먹이를 주는 행동을 반복하면 나중에는 개가 종소리만 들어도 침을 흘린다는 것으로, 어떤 자극에 반사적으로 즉각 반응하도록 길들여진 상태를 말합니다. 즉 자발성과는 관계없이, 버튼만 누르면 그에 맞춰 행동하게 되는 거죠. 그렇다면 사람들이 ‘파블로프의 개’와 같아진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전체주의(대표적으로 이탈리아의 파시즘이나 독일의 나치즘을 생각하면 됩니다)에서는, 버튼만 누르면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끔 사람을 길들이려고 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자발성이 없어진 사람은 사람보다는 잘 훈련된 개, 혹은 기계에 가까운 상태가 되는 거지요. 이렇게 인간을 완전히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만든 것이 바로 강제수용소예요. 개를 실험하듯이 인간을 실험했던 곳이라고 할 수 있죠. 참고로 아렌트는 프랑스 수용소에서 탈출하여 미국으로 건너간 난민 철학자입니다.

실제로는 매우 잔혹한 실험으로, 많은 개들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인간성을 파괴하는, 즉 자발성을 빼앗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우리가 학교 폭력과 관련해서 귀담아들을 부분은 ‘반사적으로 행동하게 길들인다’, 그리고 ‘양심이 부적절해지는 상황을 만든다’는 점입니다. 둘 다 인간을 인간답지 않게 만들려는 아주 잘못된 행동이에요. 양심이 부적절해지는 상황은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A, B, C, 중에서 누구 물건을 빼앗을래?” 겉으로는 선택권을 주는 것 같지만, 실은 올바른 행위가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고 악에 가담하게 하는 거죠. 저런 상황에 거듭 놓이게 되면 자발성이 아닌 것을 자발성으로 잘못 생각하게 되고, 인간의 본성 자체가 위험에 빠진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폭력은 인간을 침묵하게 하는 문제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요. 아렌트에 따르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이야기꾼이고,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로 다른 사람과 교류하고 소통하는 것이 우리를 인간답게 합니다. 그러나 폭력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토론도 이의 제기도 없이 오로지 침묵과 복종만이 있을 뿐이죠. 폭력이 비인간적인 이유는 신체적·정신적 해악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우리의 생각과 언어 능력을 박탈하여 인간을 한 마리 동물과 다름없이 만들기 때문이기도 해요. 폭력은 침묵을 좋아하고 생각을 싫어한다는 사실, 여러분이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여러분의 생각을 말하지 못하게 하고 무조건 따를 것을 강요한다면, 그건 나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그게 선생님이든 부모님이든 혹은 친구든 간에 말이지요.

멋있는 아렌트 삽화에 특별히 기뻤던 기억. 강서해 그림 작가님 만세!

아렌트가 한 말 중에서 학교폭력 문제에 의미가 깊은 것을 또 찾아본다면 “악의 평범성”입니다. 원뜻은 ‘평범’보다는 진부하고 사소하다는 쪽에 더 가까운데, 어쨌든 악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슨 거대하고 엄청난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 말의 핵심입니다. 그전까지 사람들은 악이라는 것이, 인간으로서 이겨내거나 거스르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힘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아렌트는 의도적으로 악을 거대하고 중요한 힘으로 보지 않았어요. 한마디로, 악은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악은 철저하게 사소하고 하찮은 것으로 남겨야 한다고, 그래야 악이 활개를 치고 기능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인간이 악을 행하는 것은 선이 약하고 악이 거대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그저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아렌트는 생각했습니다. 어떤 악마가 나를 사로잡아 나쁜 짓을 저지르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이 행위를 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나고 누가 어떤 영향을 받을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않고 그저 시키니까 생각 없이 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 누군가 나에게 이 스위치를 열 번 정도 눌러 달라고 했을 때, 스위치를 누를 때마다 옆 방에서 비명이 들린다고 해 보지요. “왜 비명이 들리는 거지?”하고 혹시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스위치를 누르라고 했으니 아무 생각 없이 누르는 사람들이 문제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별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의외로 많습니다. 이 사람들은 내가 뭐 엄청난 나쁜 일을 한다는 자각도 없어요. 그저 성실히 시키는 일을 할 뿐이죠.


나치 전범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사람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그의 주장이 꼭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나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나는 성실히 법을 따랐던 양심적이고 선량한 관료였다." 아렌트는 이런 아이히만을 보고 '평범한 사람이 얼마나 쉽게 악인이 될 수 있는가. 이는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의 책을 씁니다. 이게 바로 유명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이에요. 아렌트에 따르면 악은 무지가 아니라 ‘무사유’, 즉 생각하지 않는 데서 출발합니다. 무사유는 공부를 잘하는 것과는 무관해요.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사람도 생각하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만 생각하지 않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일”이에요. 지식만 있고 성찰이 없으면 범죄자가 될 수 있고, 또 그 곁에서 침묵하는 평범한 대다수는 공범자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똑똑한 사람일수록 그 똑똑함을 가지고, 내가 하는 행동이 결국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생각한다면 좋겠지요?

1961년 예루살렘 법정에서의 아이히만 (이미지 출처: 로이터 연합뉴스)

하지만 여러분에게 밝히자면 사실 아이히만은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독일의 베티나 슈탕네트라는 철학자는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통해, 아이히만이 원래부터 나치즘을 적극 신봉하는 사람이었음을 밝힙니다. 즉 그가 법정에서 ‘평범한 시민, 선량한 관료’를 연기했을 뿐이고, 이런 연기에 한나 아렌트조차 속았다는 점을 지적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과 관련한 논의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렌트는 폭력이 사람을 어떻게 바꾸고 자발성을 파괴하는지, 거기에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순응하고 동참하는지, 무관심과 생각 없음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통해 더 커다란 악을 구축해 가는지에 관해 매우 의미 있는 성찰을 남겼어요.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슈탕네트의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우리도 무엇이 학교폭력이라는 것을 더 크고 단단하게 만들어가는지에 관해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생각하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침묵하는 것은 악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요. 저는 여러분이 아렌트 아줌마를 떠올리며 용기를 내어 학교폭력 신고 번호 117을 주저 없이 누를 수 있는 친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에게 못된 짓을 하는 녀석들은 꼭 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꼭 합당한 벌을 받고 반성하기를, 자신의 행동이 얼마다 비인간적인 것이었는지 반드시 깨닫고 후회하기를 바랍니다. (요행히 벌을 피한 녀석들이 있다면, 평생 새벽에 레고나 밟기를 기원합니다. 특별히 뾰족한 걸로.)


물론 억울한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러려던 건 아닌데, 워낙 민감한 주제이다 보니 친구 사이의 장난과 학교 폭력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상황도 생길 겁니다. 사실 어울리고 부대끼며 서로에게 자잘한 상처를 주기도 하는 것이 학교 생활인데,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을 보면 신고하는 해프닝도 분명 있겠지요. 내가 지금 선을 넘고 있다는 건 아마 본인이 가장 잘 알 겁니다. 다들 몸과 마음 다치지 않고 맑게 클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라요.


이모네 철학 상담소는 식당도 겸업하는데요, 이달의 고민 해결을 도와줄 메뉴로는 감자조림을 골랐습니다. 잠시 방심하면 금세 독을 머금은 싹이 여기저기 돋아나는 감자처럼, 신경 써서 살피지 않으면 폭력도 그렇게 슬금슬금 싹을 틔울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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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핍박받았던 유대인의 나라 이스라엘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잔인한 일들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에 종종 말을 잃곤 합니다.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을 대상으로 집단학살을 자행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고, 전쟁범죄와 관련해 네타냐후 총리와 전직 국방장관은 국제형사재판소(ICC)로부터 체포 영장을 발부받은 상태죠. 그러나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어린 동생을 어깨 위에 앉히고 맨발로 엄마를 찾으며 울부짖는 어린 소년의 영상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꼭 우리말로 "엄마"처럼 들리는 소리가 마음을 찢어 놓네요. 이 어린이가 무사히 엄마를 찾았기를, 제발 평화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인간은 분명 폭력을 쓰지 않고도 합의점을 찾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아렌트가 말했듯 폭력은 우리의 생각과 언어 능력을 박탈하여 인간을 한 마리 동물과 다름없이 만들어요. 인간이 인간성을 스스로 놓지 않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모두 부스러질 존재이나, 서로에 의해 바스러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reel/DOzpvM5kRv5/?igsh=MWVhZ2JqZmhyZHR5N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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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해 받고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드는 후속 영상입니다.


https://www.instagram.com/reel/DO9RKMKDVfj/?igsh=cjV0c2ozaG9yNX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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