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넘어서는 세계
이 원고는 지학사에서 발행하는 청소년 월간지 <고교 독서평설>에 연재하는 글입니다. 아주 큰 차이는 없습니다만 여기 올리는 글은 최종본이 아니라 초안이에요. 해당 월이 지나고 이곳에 하나씩 올려둡니다. 오랜만에 읽으니 (보통 두 달쯤 전에 원고를 마감하기에 이 글은 5월에 썼습니다) 거 참 구구절절 글이 길고 못났구나 싶어 앞부분을 뭉텅이로 잘라냈습니다. 침묵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이토록 길게 쓰다니, 부끄럽네요.
말을 넘어서는 세계
[7월의 시] 보내지 않은 말
- 정병근, 『눈과 도끼』(천년의시작, 2020)에서
보내기 전에
말은 아름다웠다
부를 필요도 없이 너는 너였고
말하지 않아도 나는 나였다
말하지 않았으므로 풀들은 우거졌고
나무들은 가지를 쭉쭉 뻗어갔다
바위와 돌들은 제자리에서 충분히 무거웠다
보내지 않은 말은 어둠과 같아서
하늘엔 별의 눈동자들이
초롱초롱하였다
어떤 말도 될 수 있으며
그 어떤 말도 될 수 없는
경계에서 나의 말은 지혜로웠다
내장된 말을 품고
나는 아직 아름다이 접혀 있어
소리들이 먼저
내 귀의 지붕에 비처럼 내릴 때
목젖은 촉촉이 젖고 혀는 달아
아무도 부르기 싫었다
아직 나를 보내지 않았다
쓰지 않은 시는 시일까
“쓰이지 않은 시는 시가 아닐까요?”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요. <보내지 않은 말>은 그에 답변 삼아 골라드린 시인데 여러분과도 나누고 싶었습니다. “보내기 전에 말은 아름다웠다”, “어떤 말도 될 수 있으며 그 어떤 말도 될 수 없는 경계에서 나의 말은 지혜로웠다”라고 말하는 이 시가 너무도 아름다운 답이 될 것 같았어요.
빠르고 단호하게 말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에서, 말을 쉽게 내뱉지 않고 묵히며 천천히 말을 고르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대표적으로 시인이 그렇겠지요. 광대한 언어의 바다에서 끊임없이 말을 골라내고, 언어가 표현하지 못하는 우주에서 묵묵히 싸우는 사람들. 이 말이 맞는지, 나는 이 말을 보내고 싶은지 궁리하는 사람들. 언어는 이 세상 많은 소리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때로는 침묵이 더 많은 것을 말하니까요. 그런데 서로 목청을 높이려는 사람들이 우리 귀를 먹먹하게 하다 보니, 침묵이 풍성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종종 낯설게 느껴집니다. 덩굴처럼 감겨 드는 말의 정글 속에 살다 보니 말을 넘어서는 세계가 있다는 것도 까마득하게 느껴지고요. 삶의 어떤 순간은 도저히 글 따위로 부연되지 못하고, 말이나 글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할 때도 있음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삽니다.
그래서 이 시에 기대어, 말로 구성되는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어요. 보내기 전에 말은 아름다웠다는 말, 써지지 않은 시가 써낸 시보다 아름다웠다는 말을 저는 마음 깊이 이해합니다. 그 아름다움에 관해 한 번 생각해 볼까요?
말 너머의 세계
세상에는 도저히 언어화되지 않는 순간과 감정이 있습니다.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말이 축제처럼 소용돌이치지만 내뱉는 순간 다 거짓말(혹은 아무 말)이 되어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요? 이를테면 내 안에는 에베레스트 산이 들어있는데 정작 입에서 나오는 건 모래 한 줌일 것 같은 느낌. 살다 보면 그렇게 말을 잃는 때가 있습니다. 이 기분을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 순간들. 예를 들어 끙끙 앓다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했는데, 상대도 오래전부터 나를 좋아해 왔다고 답했을 때의 감정을 상상해 보세요. 오 마이 갓, 나를 둘러싼 이 영롱한 무지개를 언어화하는 순간 그 색감이나 광채를 잃을 것 같습니다. 이 행복을 대체 어떻게 표현한단 말입니까. 마음이 미어지는 때나 큰 깨달음 앞에서도 우리는 ‘할 말을 잃는다’고 표현합니다.
언어는 본질적으로 한계를 가진 도구입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도 많지요. 그런데 그 본질적 언어의 한계에다 내 표현의 한계가 더해진다고 생각해 보세요. 원래 말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이렇게 ‘총체적 난국’입니다. 소셜 미디어에 어떤 근사한 이미지나 영상을 올리면서 ‘너무 좋다, 대박이다,’라고밖에 못하는 내 표현력이 저주스럽다고 말하는 이들을 종종 목격합니다. 이 귀여운 고백이 바로 언어 너머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오스트리아 출신의 20세기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세계에 관한 깊은 통찰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는 신비한 경험이나(종교적 체험, 혹은 제가 독일에 와서 카레 소시지를 처음 먹었을 때 느꼈던 그 신비…) 강렬하고 깊은 감정(첫사랑의 설렘이나 누군가의 죽음이 일순간 몰고 오는 암흑 같은 것), 추상적인 개념(‘영원’이라든가 ‘도(道)’처럼 설명을 하고 싶어도 말문이 탁 막히는 관념들) 등 우리가 언어로 잘 표현할 수 없는 영역에 주목했는데, 언어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철학의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인식과 소통에 있어 언어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데, 이런 한계가 우리가 이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죠. “언어의 한계는 곧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말은 이런 맥락에서 왔어요.
작가인 저는 언어로 뭔가를 붙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지만, 이런 한계를 절감하는 것이 솔직히 싫지는 않습니다. 언어의 본질적 한계에 내 표현의 한계가 더해질 때, 무력감을 느끼면서 아찔해지기는 하지만 그 아찔함을 좋아해요. 어떤 말로 형체화 되지 않고 그저 가슴 어딘가에, 목젖 어딘가에 맴도는 감정들. 혹은 무언의 자기장에 들어가 그저 전류만을 감각하는 순간들. 이런 것들이 한계가 아닌 축복임을 깨닫고, 그것을 즐기고 싶습니다.
그 무력감을 좌절감으로 만들지 않고 어떻게든 표현해 보려고 애쓰는 과정도 좋아합니다. 이런 비유를 들면 어떨까, 이 자리에 저 단어를 갖다 놓으면 읽는 사람도 나의 기분에 공감하게 될까, 그렇게 주어진 도구로 최선을 다해보는 마음. 예전에 <양파>라는 시로 함께 만났던 비스와바 심보르스카는 이런 모습을 시에 담았어요. 시인은 솟구치는 말들을 한 마디로 표현하고 싶어 열심히 고민하고, 따져보고, 헤아려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장 용감한 단어는 여전히 비겁하고, 가장 천박한 단어는 너무나 거룩하고, 가장 잔인한 단어는 지극히 자비롭고, 가장 적대적인 단어는 퍽이나 온건[했]다”라고 해요. <단어를 찾아서>라는 이 시는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적절한 단어를 찾아 헤맨다. / 그러나 찾을 수가 없다. /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시집 『검은 노래』(문학과지성사, 2021)에서)
앞서 말한 ‘한계 속의 축복과 즐거움’이란, 쓰는 사람의 고뇌 속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읽는 사람으로서의 행복이기도 합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의 글을 보는 것은 저에게 지극한 기쁨이거든요. 그러니까 표현의 한계를 절감하는 자들에게서 생겨나는 또 다른 무지갯빛 자기장 같은 게 있는 셈이죠. 심보르스카의 시에서처럼, 잡기 어려운 것을 언어로 담아내려는 인간의 몸부림은 참 아름답습니다. 정병근 시인은 “보내기 전에 말은 아름다웠다”라고 썼지요. 그 미지의 아름다움에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저는 그 옆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보내려는 몸짓은 아름다웠다”, “그렇게 보내진 말은 아름다웠다”라고 조그맣게 쓰고 싶습니다.
날개이자 족쇄인 언어
언어는 우리를 먼 곳까지 데려다주는 중요하고 고마운 도구지만, 우리의 생각과 감각을 옭아매는 족쇄이기도 합니다. 이윤주 작가의 『고쳐 쓰는 마음』(2024)에는 어린 조카가 글을 모르던 시절의 일화가 들어있어요. 아이가 물티슈 뚜껑을 열려고 애를 쓰기에 도와줬더니 이내 울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포장 겉면에 달콤한 사탕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그 안에 사탕이 든 줄 알았던 거죠. 이윤주는 이를 두고 “이름을 불러야만 꽃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름을 몰라야만 사탕인 경우도 있음을, 실망한 아이를 달래며 알았다”라고 합니다. 문자 이전에는 “물티슈도 (잠시나마) 사탕 가득한 봉지가 되고, 꽃은 ‘꽃’ 이상이 되고,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 가두지 않는다”고요. 물티슈라는 글자를 모르기에 알았던 그 달고 황홀했던 세계, 오롯한 감각의 세계를 여러분은 기억할까요? 이 책의 표현에 따르면 “‘붉다’라는 글자보다 붉고, ‘보드랍다’는 글자보다 보드랍고, ‘새소리’라는 글자보다 더 경쾌한 새의 소리가 있는.”
최근에 저는 우리나라 근대전환기 여성들의 정치적 주체성을 다룬 논문을 보다가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1920년대의 소위 ‘카페껄(걸)’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교묘한 수단으로 에로를 굿(굳)세게 발산”한다는 표현을 읽고 이건 대체 뭘까 호기심이 일었어요. 이렇게도 생각을 뻗어보고 저렇게도 상상해 보면서 흥미로워하던 와중에 지인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어머, 그거 플러팅이네요.” 그 순간 개념이 단번에 이해되면서도 개념이 한정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미지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 저의 자유로운 상상이 그 단어 하나와 함께 끝나버린 거죠. 미술관에서 그림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일부러 제목을 나중에 보는 쪽을 선호하는데, 가끔은 제목이 제 생각을 한정 짓고 즐거운 상상을 방해하기 때문이에요. 단지 몇 글자의 제목이라 해도, 언어의 힘은 꽤 세거든요.
무한한 세상이 문자라는 필터를 통과하여 정렬되는 모습은 흥미롭기도 하지만 인간의 삶에 꼭 필요하기도 해요. 언어로 표현하고 소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공동체를 만들어 유지하기가 어렵겠지요. 어떤 단어로 응축되면서 선명해진 개념을 내 안에 저장하는 것은 분명 기쁨과 보람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저는 다듬어지지 않은 미지성, 그 안에서 헤매는 일의 즐거움에 대해서 더 자주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분명히 정의 내리고 잘게 나누어 서랍에 정리하길 좋아하는 인간의 이성은, 가끔 이 시를 읽으며 아름답게 침묵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말하지 않았으므로 풀들은 우거졌고/ 나무들은 가지를 쭉쭉 뻗어갔다/ 바위와 돌들은 제자리에서 충분히 무거웠다"라는, 이 고요 속의 풍성함과 깊이감을 아는 일.
시의 문장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아름다워서 눈으로 여러 차례 쓰다듬다 보니 아주 예쁜 연시(戀詩: 홍시 친구 연시 말고, 사랑을 노래한 시요.) 같기도 합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그대로 두고 그저 그 안에 잠겨 있는 순간의 기쁨이라고 할까요. 아직 나를 보내지 않은 순간의 황홀감, 경계에서 느끼는 무한한 아름다움 같은 것 말이죠. ‘보내지 않은 말’은 ‘보내지 못한 말’과는 다르니까요. 일부러 보내지 않고 가지고 있는 순간의 그 달콤하고 무한한 감각을 생각해 봅니다. 보내지 않은 말이 어둠과 같아서 오히려 그 안에 담긴 마음이 별처럼 빛나고, 그 마음이 궁금한 별들의 눈동자도 초롱초롱 빛나는 모습을 생각해 보니 마음이 간질간질하네요. 마음도 대체로는 보내지 않았을 때가 더 아름다웠던 것 같습니다.
말을 품고 접혀 있는 일
시는 언어 예술입니다. 언어를 가진 자들이 언어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정말 아름다운 행위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런 언어로도 담아낼 수 없는 마음이 있고, 언어가 차마 어깨에 져내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보았으면 했습니다. 학문이 세계를 구원하지 못하듯이, 언어가 세계를 모두 담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요. 그리고 언어로 담아내더라도, 시에서처럼 ‘그것을 품고 접혀 있는 일’의 의미도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장된 말을 품고
나는 아직 아름다이 접혀 있어
소리들이 먼저
내 귀의 지붕에 비처럼 내릴 때
7월이니 한 해의 길이도 벌써 절반이 접혔지요. 올해의 남은 시간은 이 연을 조금 더 마음에 품고 싶습니다. 글 쓰는 것이 업인 저는, 침묵하며 아름다이 접혀 있고 싶어도(이미 뱃살은 충분히 접혀 있..) 내장된 말을 품기는커녕 내장까지 쥐어짠 말들을 탈탈 털어 활자화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요. 아무리 삶에 미지와 하얀 여백을 품고서 소리의 빗소리를 듣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해야 하는 작업들은 구분과 분해와 테트리스처럼 시간을 조립하는 일들이겠지만요. 그래도 시를 읽는 마음이라는 게 결국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미지와 허공을 삶에 포함하려는 태도. 혹은 모래 먼지 속에서 피어난 조그맣고 연약한 노란 꽃을 아끼는 마음이요. 여러분도 교실에서 학원에서 시험지 위에서, 분명한 답을 말하고 정확한 단어를 내놓아야 하겠지만 (정답을 마음에만 품고 접혀 있으면 여러분의 시험 점수도 반으로 접힐지 몰라요!) 그래도 말 너머의 세상을 종종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가 아름답고 촉촉하고 달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