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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필로소퍼 인터뷰

by 이진민

<뉴필로소퍼>라는 잡지에 인터뷰를 실었습니다. '일상을 철학하다'라는 모토로 '매일매일의 삶을 성찰하는 생활철학 잡지'라는 담백한 소개를 내건 잡지입니다. 실은 올해 1월쯤 브런치를 통해서 연락을 받았고 인터뷰가 실린 것은 4월인데, 부끄럽기도 하고 해서 묵혀 두었다가 이제야 슬금 올려둡니다. 저는 저를 철학자라고 부르시는 분들로부터 최대한 멀리 도피하려는 기본자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 아니라고 바로 잡고 싶지만 그 말 꺼내기도 부끄러워요.)


실물을 독일에까지 몇 권이나 보내 주셨는데, 잠자던 물욕이 냅다 기상할 만큼 근사한 책이었습니다.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크기와 두께, 질감, 디자인까지 어찌나 저의 취향을 하나도 빠짐없이 저격하는지(그리고 광고가 하나도 없습니다!), 한국에 있었으면 과월호를 창간호부터 모두 사모으고야 말았을 것입니다. 1, 4, 7, 10월에 발행되는 계간지로 호주에서 발행하는 철학잡지 <New Philosopher>와 계약을 맺어 번역한 글 70 퍼센트, 국내 작가들의 글과 인터뷰 30 퍼센트를 담는 방식으로 제작한다고 들었습니다.

New Philosopher Korea vol. 30

매호마다 하나의 주제를 선정하는데, 제 인터뷰가 실린 호의 주제는 '선택'이었어요. 가장 마음에 드는 글을 꼽기 어려울 정도로 정말 내용이 좋았습니다. 작은 코너들까지 참 세심하게 매만지셨더라고요.

저는 여기서 맹자 할아부지 말씀이 제일 좋네요
글도 좋지만 일러스트도 정말 매우 참으로 감각적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명화들이 시원시원하게 들어있는데 너무 좋아서 꼬리 저림
너드맛 낭낭한 만화까지



제 인터뷰는 이번 호 주제에 맞추어 '내 삶의 편집권을 쥐고 있다면'이라는 제목을 달아 주셨어요. 국내 인물로는 세 번째 인터뷰라고 하신 것부터 부담스러웠는데, 너무 많은 지면을 할애해 주셔서 더욱 부담스러웠습니다.

제가 산책길에 찍은 사진들을 써 주셨어요

인터뷰 전문이 길기도 하고, 또 전체를 올려 두는 것은 <뉴필로소퍼> 측에도 곤란할 수 있어서 제가 브런치 독자님들께 특별히 전달하고 싶은 두 가지 답변만 잘라서 올립니다. 여기에 올리는 질문과 답은 서면으로 주고받은 초안입니다.


- <뉴필로소퍼 30호>, 대담 : 강희재 편집장 -


철학 전공하시는 분들이 글 잘 쓰는 거야 특이한 일은 아니지만, 이진민 작가님은 뭐랄까… 문인의 느낌이 드는 글쓰기였습니다. 시인이 낸 에세이랄까, 혹은 소설가가 작정하고 쓴 철학 에세이랄까… '글 잘 쓴다'라는 칭찬은 물리도록 들으셨을 것 같은데(들은 적 별로 없는데 물리도록 듣고 싶습니다! 욕망의 붉은색으로 표시해 봄.), 비결이라는 표현은 좀 간지럽고, '이진민 글쓰기 특강'의 주안점이 무엇일까요?


답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 글을 멋있고 아름답게 쓰는 것보다는 남을 다치게 하지 않는 글쓰기에 가장 신경 쓰고 있어요. 김소연 시인의 말을 빌면 (저는 모든 시인이 철학자라고 생각합니다) “언어는 본성이 사나운 것”이거든요. “불과 칼처럼 유용하게 사용하는 중에 필연적으로 사용자를 다치게 하는 것.” 타인뿐 아니라 저 자신도 다치게 할 수 있고요. 글쓰기 특강을 할 때도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길 수 있는 멋지고 화려한 글을 쓸 것인가 보다, 어떻게 하면 누군가를 아프게 하지 않는 글을 쓸 수 있을지 제일 먼저 고민하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가장 강조하는 편입니다. 우리는 다정하게 단호할 수 있으니까요. 기본을 지키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제 글에 당당할 수 있는 것.


그다음으로는 가능하면 쉽게, 유머를 담아서 쓰려고 해요. 편집자님들이 가장 애쓰시는 부분이 저의 개그 욕망을 얌전히 다스리는 일입니다. 근데 저는 웃기고 싶어요. 아무리 좋은 내용도 독자가 일단 흥미를 느껴 읽어야 전달이 되니까요. 원래는 논문을 쓰던 사람이라 문장이 좀 더 편안하고 다정해지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는데, 점점 나아지고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질문을 받고 좀 고민을 해봤는데, 국영수를 중심으로 열심히 공부하라는 고구마 맛탕 같은 말이지만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 말고 다른 게 있나 싶습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새로울 게 없는 말이겠지만 새롭게 듣는 사람에게는 새롭게 들리지 않을까요. 시간이 선물하는 가장 정직한 방법이죠. 참고로 저는 5년간 브런치라는 글쓰기 플랫폼에 스스로 마감일을 정해서 일주일에 한 편씩 글을 올렸고, 4년째 카톡으로 시 필사 모임을 하고 있어요. 그날그날 배달받은 시를 필사하고 그 시에 관한 단상을 써서 나누는 형식인데, 언어를 가장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분들의 문장을 읽고 쓰고 거기에 관한 생각을 적는 일이 실제로 제 작업에도 제 삶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뉴필로소퍼> 이번 호의 주제가 ‘선택’입니다. 전공을 바꾸고, 학위 공부에 대한 결정, 미국과 독일 등 체류지의 변화, 무엇보다 학업과 출산을 동시에 맞닥뜨렸을 때의 고비 등 작가님 또한 누구보다도 무수한 선택 앞에서 여러 고민이 있으셨을 듯합니다. 그럴 때 중요하게 생각한 마음먹기의 기준이 있었을까요.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가 결혼에 관해서 한 유명한 말이 있어요. “그대가 결혼을 하면 그것을 후회하리라. 그대가 결혼하지 않는다면 역시 후회하리라. 그러니 결혼을 하든 안 하든 후회하리라.” 이 말은 결혼을 향한 저주가 아니고, 우리 삶이라는 게 본질적으로 이렇다는 건데요.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인간이란 존재는 대체로 후회한다는 거죠. 즉 뭔가를 선택한 상태에서도 수없이 다른 선택지를 곁눈질하고,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안으로는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한 것이 인간이란 말이겠죠. 키르케고르는 심지어 인간은 절대적으로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상태를 30분 이상 유지하기 불가능한 존재라고 해요. 생각해 보면 맞는 말 같지 않나요?


불안을 이렇게 들여다보면 선택의 순간에 대한 두려움이 꽤 말랑해져요. 다시 말해서 인생이란 기본적으로 두렵고 떨리고 만족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 오히려 담대해지는 면이 있더라고요. 저는 일상에서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선택이 '머리카락을 자르는 정도의 효과'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해요. 머리카락을 심하게 잘못 잘라도 우리가 죽지는 않잖아요. 그리고 머리카락은 다시 나거든요. 대통령 같은 사람들이 아닌 평범한 일상생활자인 우리네 삶에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은 (부먹과 찍먹의 경계에서 탕수육 소스를 부어버리는 행위 말고는) 그다지 많지 않다고 믿어요. 어떤 선택이 내 삶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버리는 것 같아도, 그건 내 삶의 편집권을 가진 상태에서 어느 쪽에 초점을 두고 어느 쪽을 아웃포커싱 하는가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우리는 대체로 시간이 지나서 그 방향으로 다시 갈 수 있어요.


성공과 실패는 이 세상에서 정말로 정의하기 어려운 단어쌍입니다. 그러니 너무 긴장하거나, 선택 앞에서 목숨을 걸거나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제가 틀릴 수도 있고 선택이 머리카락 자르는 것 같은 일이 아니라고 해도, 가끔은 그렇게 생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떤 선택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건, 사회가 그렇게 만드는 부분이 크다고 봐요. 이를테면 어떤 선택이 곧바로 성공이나 실패로 이어진다고 믿게 하는 것 같은 착각이요. 그래서 더욱 철학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실수인데, 저는 실수와 잘못은 다른 거라고 배웠거든요. 우리가 부디 인간다울 수 있게, 실수할 공간과 시간을 넉넉하게 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해요.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 젊은이들에게요.

잡지에 실린 저희 동네 밀밭 풍경입니다. 예쁘죠?


제게 궁금한 것이 있다는 사실도, 제 답변을 들어주시려는 마음도, 제게는 늘 과분하고 신기합니다. 덕분에 저 자신과 제가 하는 일에 관해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리고 저는 내년 제 생일 선물로 <뉴필로소퍼> 전자책 1년 열람권을 셀프 선물할 예정입니다 :)


이왕 부끄러운 김에 홍보도 하나 하고 갑니다. 미술과 문학과 철학이 손잡고 나누는 단어 속 이야기, <언니네 미술관> 다음 주부터 강의 시작해요. 많은 관심과 손가락질(...) 부탁드립니다.


관심 있는 분은 아래 링크로 들어와 살펴봐 주세요.

https://academy.peoplepower21.org/courses/4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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