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게 보자, 아무튼 술
밤샘 술이며, 섞어 술, 폭탄주까지 아련한 기억 저편으로 넘어가버린, 이제는 내게 너무나 비현실적인 술. 그럼에도 아무튼 시리즈로 술이 나왔을 땐 혹했다. 책에서 아무리 술을 외쳐도, 술에 대한 내 몸의 심각한(?) 알레르기 덕에, 술을 마시고 싶은 욕구를 불러내지도 못할 걸 안다. 술에 혹하진 않겠으나 얽힌 이야기에는 혹할 건 같았다. 뒷이야기는 언제나 술을 마신 듯 마음을 간질이고 살짝 들뜬 취기가 올라오게 하기 때문에. 휴직 덕에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지라 책 구매를 주저하고 있었는데 '혼자 낄낄대다 결국은 박장대소하게 된다'는 지인의 책 소개를 보고서는 결국, 지르고야 말았다. 핑계김에 사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왔던 다른 3권의 책까지 덩달아 사게 됐으니, <아무튼 술>은 술에 취하게 하진 못했으나 책에 취하게 함은 분명하다.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밝혔듯 이 글은 "'술'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20년간 몸 안에 차곡차곡 담가놨던 술을 열어 맨 윗자리에 떠오른 이야기들"이니만큼 박장대소할 에피소드들로 화려하다. 엄청 재밌다. 한 자리에서 술술 읽고 닫을만큼의 분량, 입말과 글말을 섞은 가벼운 필치, 훔치고 싶을만큼 절묘한 비유와 생생한 묘사, 삶을 발견하는 깊이까지 감동과 재미를 한번에 잡은 책이랄까. (김혼비님이나, 출판사 제철소에서 돈받은 거 아님)
저자의 언어로 이 책을 설명하자면 "가는 기차는 천국행이고 돌아오는 기차는 지옥행일 이상한 왕복 기차권을 끊을지 말지, 그냥 얌전히(?) 걸을지 오늘도 목하 고민중"(100쪽)인 김혼비의 술 이야기, 아니 술 마신 이야기. "술이 가져다주는 천국 같은 기분과 지옥 같은 숙취를 생생히 그려낸 책"(11쪽)이 바로 <아무튼, 술>이다.
냉장고 문을 닫는 순간 몇 시간 후 시원한 술을 마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듯이, 신나서 술잔에 술을 따르는 순간 다음 날 숙취로 머리가 지끈지끈할 가능성이 열리듯이, 문을 닫으면 저편 어딘가의 다른 문이 항상 열린다. 완전히 '닫는다'는 인생에 잘 없다. 그런 점에서 홍콩을 닫고 술친구를 열어젖힌 나의 선택은 당장 눈앞의 즐거운 저녁을 위해 기꺼이 내일의 숙취를 선택하는 것과도 닮았다. 삶은 선택의 총합이기도 하지만 하지 않은 선택의 총합이기도 하니까. 가지 않은 미래가 모여 만들어진 현재가 나는 마음에 드니까. (90쪽)
술먹는 이야기로 비유한 삶의 발견. 이쪽 문을 닫으면 저쪽 문이 열린다는 진리는 언제나 진리다. 하지만 우린 손에 잡고 있는 것을 통쾌하게 놓고 다른 문이 열릴 것을 기대할만큼 통이 크지 못하고 자주 소심하다. 용기가 필요할 때 내 앞에 닫힌 문, 그 뒤로 열릴 문을 떠올리기만 해도 참 좋다. 우리 삶은 선택의 총합이기도 하고, 선택하지 않은 것들의 총합이기도 하다는 발견도 좋다.
훔치고 싶은 문장들이 참 많은데 이사를 가는 날을 묘사한 문장이나,
가구와 세간살이들이 하나씩 지상으로 올라갈 때마다 마음은 계속 내려앉아 지하에 고였다. 집이 '집'에서 '공간'으로 바뀌어가고 마침내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우뚝 섰을 때, 아직은 여기저기 잔상들이 묻어 있어 그래도 내 집인 것만 같은데 이제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내가 어젯밤까지만 해도 저 구석에서 뒹굴며 사과를 먹었다고! (87쪽)
아무리 배우려고 욕레슨을 받아도 안되던 욕. "그냥 사는 게 씨발스러우면 돼. 그러면 저절로 잘돼."라던 욕선생 P의 말이 떠오른 순간을 묘사한 문장도 좋았다.
한참 욕을 하다 보니 조금 후련해지면서도 더 슬퍼졌다. 씨발이 욕이 아니라 눈물 같았다. 목 놓아 울고 싶은 유의 슬픔이라기보다 뭔가 매우 크고 중요한 어떤 것이 훼손된 것 같은 슬픔이었다. (119쪽)
홍콩에서 일하던 시절, 하우스 파티에 갔다가 스위스식 폭탄주를 먹고 고꾸라질만큼 취했을 때, 그 과정을 묘사한 문장도 재밌다.
취기가 작은 눈금을 타고 서서히 올라오는 게 아니라 육상선수처럼 성큼성큼 뛰어올라오고 있었다. 취기를 앞서기 위해 거의 뛰듯이 걸었지만 몸집이 커진 취기란 늘 인간보다 빨라서 광장의 끄트머리에 다다랐을 쁨에는 결국 나를 앞질렀다. (127쪽)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페리 안에서 들었다던 맑고 쨍한 소리. 들어봤지만 들어본 적 없는 소리를 묘사한 문장은 내 귀에 별이 반짝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주류 코너에 즐비하게 놓인 온갖 종류의 술병들이 배의 엔진이 만들어내는 동요에 따라 흔들리며 좌우앞뒤에 높인 술병들과 살짝살짝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소리였다. 커다란 벽 세 면을 둘러싸고 있는 술병들 사이에서 동시에 울려 퍼지는 소리는 은근하면서도 장대하고 맑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했다.
주파수를 한번 찾고 나니 그동안 듣지 못했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또렷이 들렸다. 묵직한 병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중후한 울림과 가늘고 기다란 병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울림이 수시로 교차하며 시간에 어떤 틈도 내어주지 않았다. 무한하게 이어지는 숨낳은 술병들의 울림을 커다란 배 안의 커다란 술 진열대가 아니라면 어디서 또 들을 수 있을까. 가만히 선 채로 술들의 소리를 한참 동안 들으며, 세상에 별이 반짝반짝대는 소리라는 게 있다면 이런 소리일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는 떨어지는 별을 보면서는 보드카 한 모금을, 반짝이는 별을 보면서는 발트해를 지나는 배 속 수많은 술병을 떠올리게 되겠지. 어떤 술꾼의 세계에서는 별마저도 술과 이어져 있다. (71쪽)
나도 분명, 이 배를 타고 헬싱키에서 상트페테부르크로 갔었고, 늦은밤까지 맥주를 마시며 타로와 수다를 떠느라 나름 취해있었는데, 이 소리를 놓쳤다니 생각할수록 아쉽다. 여성의 혼술로 확장된 저자의 혼술 경험은 여자 혼자 여행을 가기 힘든 세상과 이어져 깊게 공감됐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이야~ 세상 참 좋아졌다. 여자가 초저녁부터 밖에서 혼자 술도 마실 수 있고"같은 세상이 그리 좋아지지 않았다는 증거이자 이유 그 자체인 사람들의 비아냥 섞인 시비를 겪었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 그동안 여자 밖혼술러들은 크고 작은 그런 반응들을 '그러려니'하는 상수로서 이미 계산에 넣은 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때로는 그러면 그럴수록 전투력이 상승해서 보란 듯이 더 당당하게 술을 마시고 나오기도 했다. 남자 밖혼술러들에게는 없을 상수였다. 여자 혼자 타는 택시와 남자 혼자 타는 택시가 다른 세계를 싣고 달리듯이. 여자가 밥집에서 혼자 술 마시는 걸 두고 '멋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역시 많은 건, 그 행동에 무릎쓴 '무언가'가 포함되어 있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혼자 술 마시는 남자를 두고 멋있다고 말하지 많는 것처럼. 우리가 원하는 건 멋있는 게 아니라 그저 술을 마시는 건데. (153쪽)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더 공감하며 읽을 부분이 많을테고, 아마 한잔 땡겨 술을 사러 가거나 친구에게 전화를 돌리게 될지도 모를 책. 술이 주는 기쁨과 숙취의 고통까지, 다 좋은 건 없다는 인생의 엄숙한 진실을 술을 통해 마주하게 하는 책. 술 권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