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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Mar 01. 2022

제갈량의 북벌 (3) - 가정 전투

1차 북벌의 진행과 가정 전투

촉나라 무장 조운(자는 자룡)


228년 봄, 조운의 별동대와 옹주 지방의 투항



  맹달이 사살되던 시점인 228년 정월. 드디어 제갈량의 1차 북벌이 시작된다. 기산-가정 루트로 천천히 올라가는 것이 제갈량의 전략이었다. 그렇지만 패를 직접 보여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제갈량은 위나라를 속이기 위해 별동대를 조직한다. 유비와 함께 수많은 전장을 누빈 오호대장군 중 한 명인 조운이 기곡으로 향한다.

  동시에 제갈량은 촉나라 본대를 이끌고 기산으로 향한다. 기산을 넘으면 천수, 가정 등이 위치한 옹주 서쪽 지방으로 갈 수 있다. 이 지역에는 상대적으로 촉나라를 막기 위한 위나라 병력이 적었다. 그 이유는 제갈량이 시간도 오래 걸리는 농서 루트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진창과 장안 등 위수 지역의 도시들의 방어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1차 북벌에 참가한 조운은 삼국지연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조자룡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할 것이다. 그는 하북 지역 지배자였던 공손찬 휘하에 있던 장수였다. 공손찬과 유비가 친했기에 자연스레 유비와 만나게 되었고, 공손찬이 원소에 의해 패배하자 유비에게 가 몸을 의탁했다. 이후 유비의 휘하에서 관우와 장비 못지않은 활약을 했다.

  227년에 이르러는 상당한 고령의 장수가 되었다. 조운의 정확한 생 연도를 알 수 없으나 유비와 비슷한 것으로 추정되니 이 시기쯤 대략 60대 중후반의 나이였을 것이다. 당시 기준으로 봤을 때 이미 은퇴를 하고도 남았어야 했다. 실제로 제갈량의 남만 정벌 당시 조운의 출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유비 사망 시점과 동시에 전장에서는 물러나 고위 명예직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제갈량이 1차 북벌이 시작되자 조운은 전장으로 돌아온다. 북벌 시점 촉나라 군 총사령관의 역할은 이엄이 맡았다. 제갈량은 총사령관을 조운으로 임명하고 이엄을 후방에서 지원하도록 강주로 파견시켰다. 또한 조운과 등지를 기곡으로 향하게 하여 위나라에게 혼란을 주었다.



  제갈량은 북벌을 오랜 시간 동안 철저하게 계획했다. 옹주 서부에 위치한 서량의 농서 지방에는 이민족인 강족이 같이 존재했다. 제갈량은 북벌 이전부터 강족과 긴밀하게 협력하여 북벌을 시작하게 되면 긴밀하게 연락하여 촉나라에 귀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제갈량의 북벌이 시작되자 농서 지방을 비롯해 옹주 3개군(안정, 천수, 남안)이 제갈량에게 호응한다.



  위나라 측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설마 했던 옹주의 반란으로 제갈량이 군대를 이끌고 간 것이 확실시되었다. 이 지역을 방어하는 유일한 병력은 서쪽 방면에 위치한 서량의 서막과 옹주의 반란에 참여하지 않은 상규의 곽회뿐이었다.

  대촉방면 위나라 사령관이었던 조진은 조운이 기곡을 넘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본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다. 더불어 옹주-농서 지방이 촉나라에 호응했다고 하자 위나라 황제 조예는 장합을 파견해 이를 막게 했다. 장합의 군대가 선택한 곳은 가정이었다. 가정은 위수를 따라 옹주 지방으로 넘어가는 주요 길목이었다.


  제갈량은 장합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고민에 빠졌다. 제갈량도 가정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에 촉나라에서 가장 유능한 장수가 출격해야 한다. 촉나라 참모진들을 대부분 위연이나 오의 등 경험이 많은 장수를 추천했다.


  하지만 제갈량의 선택은 마속이었다.




기곡 전투



  촉나라의 선봉장 조운과 위나라 사령관 조진이 맞붙었다. 그러나 이 전투가 메인 매치는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전투는 가정에서 장합과 마속의 전투였다. 조운과 등지에게 주어진 병력은 소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사 '조운전'에 기록에 따르면 놀라운 성과를 보여 제갈량의 본대가 옹주 지방을 질주하는 데 많은 시간을 벌어준다.




“조운과 등지의 병사는 약하고 적은 강하여 패했으나, 군사들을 거두어 굳게 지켜 대패하지는 않았다.”  

- 정사 '조운전' -



  하지만 조운은 여기서 한 가지 실수를 한다. 기곡에서 조진의 군대에게 패한 뒤 넘어오는 잔도를 불태워버린 것이다. 이 행동은 실책이었다. 비록 조운의 군대는 안전하게 한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조진의 군대가 추격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북측에 월지성으로 올라간다. 조진의 군대는 촉에 호응한 반란 지방을 하나둘씩 점령한다. 조진이 조운군을 추격하게 두었으면 제갈량이 옹주로 갈 시간을 벌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조운이 파괴한 잔도를 훗날 복구하느라 북벌에 대한 시간을 많이 허비한다.



장합 ( 출처 : KOEI - 삼국지 시리즈 )


가정 전투의 중요성



  조운이 조진에게 패하고 있던 시점 마속과 장합의 군대가 가정에서 만난다. 옹주의 서부에는 이민족이었던 강족이 위치하고 있다. 제갈량은 강족 사람들이 평소 위나라에 대해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이용해 북벌 시 호응하도록 유도했다. 강족을 포섭하면 서량의 서막이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는 것을 견제할 수 있었다. 서막은 위나라의 관료 출신이라 제갈량의 북벌에 호응 할리 없었다. 만에 하나 서량의 군대가 옹주로 넘어오는 것을 대비한 카드가 바로 강족이었다.




  이런 점을 보아 제갈량은 철저한 준비성을 갖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농서 지방의 반란 준비, 강족의 호응 유도에 상용 태수 맹달의 배신까지 계획을 해놓은 상태였다. 그가 왜 천재의 대명사가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위나라는 위수 변으로 흐르는 장안-진창-상규 지방을 보유하고 있었다. 장안과 진창은 안전했지만 농서 지방에서 유일하게 상규의 곽회는 위태로웠다. 곽회 역시 위나라에서 파견된 장수였다. 장합의 목표는 농서 지방 확보를 위한 곽회 구원이었다. 지도에서 보면 위수를 따라 상규와 진창이 굉장히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두 지점 사이의 길을 사람이 다니기 매우 힘든 길이라 상규로 향하기 위해서는 촉나라 지역인 무도군을 거쳐가거나 북쪽의 가정을 넘어가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무도 루트는 한중에 있는 본대에다가 이엄의 후방 군에게까지 표적이 되므로 너무 위험했다. 장합의 선택인 당연히 가정이었다.

  촉나라 입장에서는 가정을 지킬 수 있다면 상당한 시간을 벌 수 있다. 상규를 점령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렇게만 된다면 촉은 농서 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확보할 수 있다. 게다가 서량이 강족과 촉에 둘러 쌓여 고립된다. 이후 안정에서 남하하는 군대와 기곡에서 출발하는 부대가 협공하여 진창을 점령한다. 이후 진창에서 장안으로 출진한다면 앞서 위연이 언급한 자오곡 루트 조차도 엄청난 가치를 지니게 된다.


  즉, 가정은 촉나라 입장에선 1차 북벌의 성공의 요충지였고 동시 위나라 입장에선 북벌 저지의 핵심이었다.



드라마 삼국지에서의 마속



가정 전투



  시간은 촉나라의 편이다. 농서 지방도 촉에 호응했으니, 장합의 본대가 넘어오지 못하게 시간을 번다면 제갈량의 본대가 알아서 옹주 지방을 정복해 나갔을 것이다. 가정에서 마속의 역할은 시간 벌기였다. 시간이 없는 건 장합의 군대였다.

  마속의 군대가 먼저 가정에 도착한다. 마속과 그의 부장이었던 왕평은 가정에 도착하여 본진을 세운다. 촉나라 군대는 당연히 장합의 본대를 막기 위해 길목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마속의 선택은 산 꼭대기였다.


  부장 왕평은 마속이 가정 정상에 진을 친다는 말을 듣고 만류했다. 왕평은 가정의 산세를 보아 병력 운용이 힘들고, 산지에 올라가면 물이 부족해 보급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마속은 왕평의 의견을 끝내 무시했고, 산 위로 병력을 이끌고 올라간다. 왕평은 마속의 지시에 반기를 들고 산 아래에 1,000여 명의 군사와 함께 주둔했다.


  촉나라 장수 마속은 제갈량의 총애하는 부하였다. 마속은 유비가 형주에 입성할 당시 형주의 명사 마 씨 집안의 다섯 아들 중 한 명이었다. 그중 넷째 마량이 가장 뛰어났다고 전해지고, 그가 흰 눈썹을 가지고 있어 백미라는 고사가 그에게서 나왔다. 그리고 마속은 다섯 형제의 막내였다. 유비 휘하에 있던 시절부터 제갈량은 마속의 재능을 보고 그를 상당히 총애했다.

  하지만 사람을 잘 보기로 유명한 유비는 그를 싫어했다. 유비는 마속을 보고 그는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사람이니 큰 일을 맡겨서는 안 된다고 제갈량에게 누차 언급했다. 북벌 시점으로부터 4년 전에 유비가 사망할 당시에도 제갈량에게 마속을 중히 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제갈량은 유비의 간언을 듣지 않고 그에게 큰일을 맡겼다. 그것도 1차 북벌에게 가장 큰 일인 가정 전투 배치였다.


  위나라 장수 장합은 전장의 베테랑이었다. 원소 휘하의 장수로서 활약했던 그는 조조에게 귀순하여 그의 중요 전투마다 참여했다. 장합은 가정에 도착해 마속이 산 위에 진을 쳤다는 보고를 받았다. 장합은 상대방의 실수를 넘길 사람이 아니었다. 곧바로 위나라 장합의 군대는 마속의 군대를 포위한다. 산 위에 진을 치고 있으니 마속의 부대가 보급을 받을 길이 없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식수가 떨어진 마속의 군대는 점차 사기가 꺾였고 힘이 빠졌다.

  울며 겨자 먹기로 마속은 장합의 군대를 공격한다. 하지만 승부는 싸우기도 전에 결정 났다. 마속의 부대는 장합과 싸울 힘이 전혀 없었다. 결국 마속의 부대는 장합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하며 패배한다. 다행히 길목에 자리 잡고 있던 왕평이 북을 울려 장합이 추격을 주저하게 했다. 덕분에 촉나라 군대는 산개하여 내려왔고 전멸만은 피하게 된다.


  가정에서 패배하며 제갈량의 1차 북벌도 사실상 종료된다.





P.S.

최대한 정사 삼국지를 기반해 작성했으나 서기 200년대의 자료가 희박해 작가의 각색 혹은 '삼국지 연의'의 스토리가 다수 포함되었습니다.

당대 인물들에 대한 이미지 자료가 희박하여 '코에이(KOEI)'사에서 개발한 '게임 삼국지' 시리즈의 이미지를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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