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3학년 2학기 복수전공 필수과목에서 전부 2등을 한 적이 있다. 대학시절 학과에서 나름 공부를 잘한 편이었다. 복수 전공 말고 원래 전공에서 과탑으로 한 학기 전액 장학금 받은 적도 있었다. 물론 4학년 때 일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A 근처에도 못 가봤다.
그래서 그런지 각종 미디어 매체나 스포츠에서 준우승을 반복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게 공감이 간다. 승부욕이 원래 강한 편이라 당시 성적에 나름 만족하면서도 한편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컴퓨터 관련 전공이었는데 지금도 복수 전공을 살려서 입사했다. 이후 사회에 나가보니 학교처럼 직접적인 점수의 줄 세우기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순위로 기준을 도통 알 수 없는 줄 세우기만 있을 뿐이다. 공정하게 실력으로만 경쟁해 본 경험은 대학 시절이 마지막이었다. 일정 인원과 모여 실력으로 경쟁해본 적이 많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전공에서 1등을 못해보고 최대 2등만 해본 것은 내 인생에서 진한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나는 유럽 축구를 정말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영국 프리미어리그 소속의 첼시 F.C 광팬이다. 05년도부터 좋아했으니 어느덧 18년 차 팬이 됐다. 18년 축구 시청 역사 중 가장 기억의 남는 경기를 하나 꼽으라면 바로, 07-08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다.
한국 유럽 축구 팬들은 당시 토너먼트에서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준 박지성이 결승전 교체 명단에도 들지 않아 익숙한 경기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새벽에 일어나 첼시를 응원했다. 경기는 치열했고 연장까지 승부가 나지 않아 승부차기로 접어들었다. 앞서 맨유의 호날두가 PK를 실축해 첼시의 마지막 키커이자 주장인 존 테리가 성공시킨다면 첼시의 우승이었다. 비가 엄청 쏟아지고 있는 구장에서 마지막 키커로 나선 존 테리는 발이 미끄러져 실축한다. 이후 반데사르 골키퍼가 환호하는 장면까지 아직도 그 장면은 생생하다. 결국 7번 키커마저 실축하며 맨유의 승리로 끝이 난다. 그 해 첼시는 챔피언스 리그, 프리미어 리그, 칼링컵 3개 대회에서 준우승을 기록했다.
또 다른 준우승의 아이콘 하면 생각나는 사람은 과거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홍진호다. 홍진호는 개인 소속으로는 물론 그의 소식팀 KTF 매직엔스마저 지독한 준우승 징크스에 막혀 우승을 못했다. 인터넷상에서는 숫자 '2'를 홍진호 자체에 비유하곤 한다. 그는 실제로 여러 인터뷰에서 반복되는 준우승에 대한 아픔을 자주 언급했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당시 정말 힘들었다고 말했다.
2등을 반복해서 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그들을 2인자 포지션을 자처한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주 2등을 한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불리한 포지션으로 들어간다. 기존 실력은 대등하지만, 어려운 상황을 반전시키고 싶은 욕구가 있어서 항상 초반에 지고 들어간다. 이게 반복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징크스가 된다. 반대로 1등을 잘하는 승부사들은 이런 식으로 상대와의 차이를 조금씩 벌려 스노우볼을 굴릴 줄 안다.
2등을 자주 하는 사람들도 나름 준비를 단단히 한다. 나름대로의 기초 실력과 게임 플랜 (시험 플랜)을 갖추고 있고 이게 나름 괜찮은 전략들이다. 반대로 1등을 잘하는 사람들은 2등의 전략 그 이상을 해낸다. 번뜩이는 전략을 내세워 상대의 전략을 의미 없게 한다. 자신이 해야 하는 것 그 이상을 늘 바라본다. 정해 놓은 범위가 있으면 그 이상을 하는 사람들이다. 근데 돌아보면 항상 그 이상을 찾아서 해내는 사람들이 1등을 하고 성공을 한다. 흔히 말하는 위닝 멘탈리티는 여기서 나온다고 본다. 결국 그 차이가 만년 2등을 만들게 된다.
준우승은 아프다. 그 아쉬움이 늘 진하게 남는다. 뭔가 조금만 더 잘했으면 하는 그 특유의 진한 아쉬움이 있다. 결승전에 올라 준우승을 한 사람들은 그 아픔이 더욱 클 것이다. 한 경기 차이로 승자와 패자가 갈리게 된다. 2등은 패배자들 중에서 1등일 뿐이라는 말도 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예전 개그콘서트에서 나온 유행어다. 1등은 다른 사람들도 기억하지만 2등을 기억하는 사람은 나 혼자다. 경험해 봐서 저 말이 맞다는 걸 너무 잘한다. 2등을 한 사람도 분명 실력자이지만, 실제로 그들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유리 가가린은 알아도 2호 우주인은 누군지 잘 모른다. 마젤란은 알아도 2번째로 지구를 일주한 사람은 누군지 모른다.
세상은 2등을 기억하지 못해도 당사자는 반드시 기억한다. 그 에너지가 좌절감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원동력이 될 수 도 있다. 2등을 했다는 것 자체가 분명 실력이 있다는 말이다. 더불어 1등을 아직 못했으니 더 올라갈 개선의 여지도 있다는 거다. 올라갈 여지가 있는 사람 중 가장 실력자다. 이 것만 봐도 굉장히 행복한 사람들이 아닌가?
이 세상에 있는 2등에게 이 글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