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승진발표

by 새벽

2024년 12월 26일.

승진 발표가 났다.

급여를 받는 직장에서 그 속의 구성원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승진'.

나는 3년 전에 처음으로 그 긴장을 겪어본 입장이어서 올해 본인 차례라고 기다리는 직원들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하고 마음이 쓰였다.

발표 당일, 승진 문서가 등재되었는지 업무 틈틈이 문서함을 여러 차례 열어보고는 했다.

해마다 오후 4시 즈음에 문서가 등재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올해는 가깝게 지내는 선배가 3급 승진을 목전에 두고 있었던지라 여러 차례 문서 열람을 하게 되었다.


2020년 12월 초 저녁 8시 즈음, 총무 인사 부서에 근무하는 선배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때 나는 식구들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한참 설거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j, 집이야? 통화 가능해?"

"예, 설거지 중이었어요. 이 시간에 어쩐 일로요? 저녁 식사는 했어요?"

선배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j...... 승진 급수 티오(TO)가 작년보다 많아. 특히 4급이."

"아! 그래요. 근데, 그게 왜......"

"다들 j 자리가 하나 있는 거라고 하는데."

"예?! 제가 승진을요?"

"아무도 반박은 못 할 듯. 4급 승진할 만한 직원 이래저래 다 빼고 남는 티오야. 그간 진짜 열심히 했잖아. 사실, 이 전화를 할까 말까 몇 번을 망설였는데...... 나 이렇게 선수 쳐서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근데, 사심이 작동했는지 아직 아무런 결과도 모르지만 우리 부서에 도는 여론이 이렇다 하는 걸 말해주고 싶어서. 괜찮지?"

"아유~~ 괜찮죠. 설령 아니라고 해도 지금 말만 들어도 기분이 너무 좋네요. 저를 좋게 봐주고 있는 거잖아요. 결과야 어떻든 선배 원망 안 할게요. 사심에 전화 주신 거니까. 그리고 마음 써 줘서 고맙습니다."

"그래, 연말에 나 시간 많아. j 한 턱 기다린다."

평소 진지하고, 선후배들 사이에서도 신뢰도가 높은 선배이기에 그 전화가 결코 가볍지 않게 느껴졌다.


전화를 끊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덤덤한 척 전화 통화를 마쳤지만 마음은 그러지 않았다. 때마침 양치질을 마치고 나온 남편이 "왜 그러고 섰어요?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네?"하고 나의 멍을 깨워줬다.

"방금, s선배한테 전화가 왔어요. 내년 4급 티오가 작년보다 많이 늘었는데, 내가 그중 한 명이 될 가능성이 높은가 봐. 4급 승진 예상자 다 빼고도 남는 티오라고 그러네요. 결과야 어떻든 듣고 나니 기분은 좋네요."

남편은 어이없어했다. 조직 인사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사람들 말에 휩쓸리지 마라, 마음 비워라, 무엇보다 승진할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잖나...... 등의 말로 나의 미소를 진심으로 염려했다.


그렇다. 나는 사실 그 해 승진은 생각지도 않았다. 왜냐면 나보다 먼저 과장 대우 자격을 받은 직원들이 매년 평균적인 승진 인원만큼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다음 해(2021년)에 승진할 수 있을 거라는 나름의 시간 계산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묵묵히 열심히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승진을 염두에 둔 열심히라기보다는 내 포지션에 대한 책임감이라고 하는 게 더 맞았을 것이다. 차근차근 꾸준히 하다 보니 5년 연속 내 영업 성과가 매 해 전국 순위 10위권, 20위권을 왔다 갔다 했고, 자동으로 따라오는 표창장과 여러 부상들, 연수로 넘쳐나고 있었다. 이렇다 보니 선배의 전화를 받고 나서 '나는 승진할 자격이 충분하다.'는 나름의 합리적 결론에 도달했다. 그날부터 잠을 설치기도 했고, 이제 승진하면 유니폼이 아닌 사복 정장을 입을 테니 저녁 설거지가 끝나면 늘 하던 독서를 접어두고 쇼핑몰 사이트에서 '여성 오피스룩', '여성 캐주얼 정장', '여성 정장 바지' 등의 검색어를 넣어가며 마우스를 만지작 거렸다. 매일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또 오만 가지의 상상 나래를 펼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승진 발표 문서에 내 이름이 등재된 것을 보고 직원들이 깜짝 놀라는 모습, 그 놀람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무심하게 옅은 미소를 짓는 내 모습(실제로 거울 보면서 미소 연습도 몇 번 했다.), 직원에게 진상 부리는 고객을 아주 세련되게 격파해 주는 내 모습, 직원들이 너무 싫어라 하는 외부 전화 수신 내가 다 해주는 모습, 지점장님과 직원들 사이에서 매끄러운 가교 역할을 해주는 내 모습 등을 말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붙여 승진 발표일이 12월 24일이라는 소위 '카더라'를 듣고서는 남몰래 샴페인도 사 두고, 샴페인과 함께 먹을 국내산 냉동 왕새우도 미리 구매해서 바로 조리해 먹을 수 있도록 껍질 까고, 내장 빼서 손질까지 다 해 두었다.


2020년 12월 24일.

나는 출근 때부터 무던히 애썼다. 나와 반대로 남편은 나의 상기된 마음을 염려했다.

나의 흥분을 다른 직원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여러 날 연습했던 무심한 듯 옅은 미소를 다시 한번 엘리베이터 안 거울을 보며 연습하고, 지점 직원들이 주고받는 대화에 나와 상관없는 듯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척,

이를테면 "오늘 진짜 누구는 최고의 이브고 누구는 최악의 이브겠다.", "그러게, 승진 발표를 꼭 이런 날 해야 하나.", "당사자만 힘든 게 아니라 가족들 생각도 좀 해야죠." 등의 대화를 천연덕스럽게 주고받았다. 그 와중에 속으로는 오후 4시 이후의 내 모습과 지점 직원들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오후 5시, 승진 발표가 났다.

"요즘 우리 회사 승진 발표를 보면 합리적이라는 느낌이 많이 들죠?"

"될 만한 직원들이 그래도 다 승진했네요."

"4급 승진자 명단을 보면 다들 반박 못하겠는데요?"

"와!! 오늘 승진자들에게는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이브가 되겠네요."


지점 직원들이 승진 결과에 대해 여러 말을 주고받는 동안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찬찬히 승진자 명단을 보았다. 이럴 수가! '내가 승진 못한 건 둘째 치고, 저 선배가 승진한다는 게 가당키나 해?', '누가 봐도 저 선배보다는 내가 먼저 아닌가?' 콧구멍이 확장되고 있었다. 표시가 안 나게 하려고 애쓰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보고 또 봐도 내 이름은 없었다. 그 와중에 한 직원의 고마운 말이 들렸다.

"나는 모르겠다. 승진자들은 즐거운 크리스마스고, 우리는 정시 퇴근이 중요해! 집에 갑시다!"


한 2주 정도 힘들었다.

원망 안 할 거라고 했던 전화 준 선배를 원망하기도 하고, 남편이 염려하며 해 주었던 말들이 떠오르고, 백지로 샴페인과 왕새우를 타박하기도 하고......




다음 해(2021년) 나는 승진했다.

가혹하게도 회사는 또 12월 24일에 발표했다.

하지만 1년 전 연습했던 무심한 듯 옅은 미소는 짓지 않았다.

끝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탕비실에서 조용히 받았다.

"감사합니다."

그날 내가 가장 많이 한 말이다.

오히려 조심스러웠다. 나의 무절제한 미소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나를 좀 더 단속하게 했다. 승진 발표가 나고 1년 전 나에게 전화 주었던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고, 너 오늘 다른 스케줄 있어? 없으면 나하고, y 하고 저녁 식사 같이 하자. 축하 파티 우리가 해 주고 싶어서."

마침 남편도 야간 근무였고, 아들도 야간 자율학습으로 귀가 시간이 10시가 넘어야 했다.

선배는 1년 전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본인이 괜한 말을 해가지고 마음이 힘들었다고 한다. 경솔하게 말해서 미안하다는 말까지도.




승진하고 3년이 지난 지금.

업무에 대한 시각, 사람에 대한 시각, 크게는 직장 생활에 대한 시각이 조금씩 조금씩 변했다.

업무는 승진 전 보다 더 난도가 높고, 그 범위도 방대해져 몸은 힘들었지만 내 마음은 변화된 시각으로 인해 조급함 보다는 여유가 더 많이 자리 잡았고, 이제 곧 5년, 10년 이내에 퇴직할 남편과 나의 퇴직 후 인생 설계에 많은 비중을 두게 되었다.

글쎄, 3년 뒤 다시 있을 3급 승진 순서가 오면 내 마음이 또 어떻게 요동 칠지는 모르겠지만 승진이 주는 기쁨과 그 보다 더 큰 책임감의 무게는 회사 테두리 내에서만 고민하기로 하고 지금은 내 옆에 있는 남편과 어떻게 하면 더 건강하고, 예쁘게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 연구가 우리 부부의 주요 관심사다.


선배는 3급 승진을 했고, 3년 전처럼 우리 세 사람은 조촐한 브런치 파티를 했다.

그렇게 이번 한 주를, 올해를 보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