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이 메인 재료, 성과는 조미료
지난 글에서 살면서 1년 이상을 꾸준히 해본 일이 많지 않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 원인은 합격과 고득점 등 외적인 성취와 인정을 연료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럼 나는 1년 이상 지속해온 일이 없을까? 일이라는 단어를 먹고 사는 것과 관련있는 행위라고 생각하면 그렇지만,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바라보면 몇 가지가 떠오른다.
우선 연애를 오래 하는 편이다. 주변에서는 3년 이상이면 장기 연애로 보는 것 같은데, 그 기준을 초과하는 연애를 해본 적이 있으며 지금도 하고 있다. 어떻게 연애는 오래 할 수 있었을까? 우선 연애는 애초에 지정된 목표 같은 것이 없으니 과정에 충실하게 되었다. 3년 이상 연애한다고 뭘 주는 것은 아니니까. 그보다는 매일의 연애가, 구체적으로는 매번의 데이트와 연락이 만족스러운 시간이 되는 것에만 집중했다. 싸울 때나 힘들 때도 있었지만(많았지만) 그 역시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연애에서는 급작스럽게 에너지가 떨어지는 일은 아직까지 없었다.
(생각해보니 연애 경험에 비해 미팅 등 모르는 이성을 만나는 일은 많이 해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건 연애로의 발전이라기보단 내가 얼마나 매력있는, 인기있는 사람인지 확인하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대학교 1학년 1학기 때 몰아서 10번 정도 해보고는 아예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다음으로는 2년이 다 되어가는 풋살이 떠오른다. 나는 학창 시절에는 축구보다는 농구를 많이 했다. 초등학교 올라갈 무렵 또래의 남자 아이들이 다들 그러했듯 축구를 먼저 접하긴 했는데, 내가 생각해도 재능이 아예 없었다. 그러다 보니 성과가 나지 않았고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그나마 재능이 있었던 농구를 주로 했었다. 그런데 대학교 올라가서는 잘 하지 않게 되었다. 중고등학교 때처럼 점심, 저녁 시간에 자연스럽게 할 기회가 있지는 않았지만, 동아리도 있고 찾아서 하면 되는데 굳이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대학 시절에는 공놀이와 잠시 멀어졌었다. 그러던 중 작년 새해 초에 고등학교 친구 한명이 간만에 모여서 공이나 차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이벤트성으로 간만에 친구들이랑 모인다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차보니 친구들 중 제일 못하면서 제일 재밌어했다. 어릴 적에는 못하면 눈치가 보이고 재미도 없었는데 이젠 그런 것도 별로 없어진 것 같다. 그날 이후로 나는 1년 10개월 동안 90번 가까이 공을 차러 나갔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시비가 붙어도, 실력이 늘지 않는 것 같아도.
(생각해보니 보기좋은 외형을 만들기 위한 웨이트 트레이닝은 번번이 3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대충 거울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보이면 슬쩍 그만두곤 했다)
연애와 풋살을 오래할 수 있었던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보면, 결국 목표 지점을 정해두기보다는 과정 자체에 몰입했다는 것이다. 정해진 목표에 가장 빨리 도달하기 위해 무리하지 않았다. 매일, 매번이 즐거운걸. 굳이 현재를 외면할 필요가 없었다. 그보다는 매일, 매번이 더욱 행복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나름대로 서서히 실력도 늘어갔던 것 같다. 비록 그동안 성취했던 일들보다 빨리 늘지는 않았지만.
물론 먹고사는 일과 연애, 운동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먹고사는 일에는 훨씬 많은 어려움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이번에는 적어도 과정에서의 행복을 외면하고 싶지는 않다. 어렵지만, 힘들지만 그럼에도 계속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싶다. 그동안은 성과와 성취가 메인 재료였다면, 이제는 비중을 낮춰서 조미료로만 활용하고 싶다. 그러려면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 중에서 타인에게 가치를 줄 수 있을 만큼 잘하는 일은 무엇일지 알아봐야 할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이에 대한 지금의 생각을 써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