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생이 만족스러우면 불필요한 여정은 사라진다
그동안 국내 해외 할 것 없이 여행을 많이 다녔다. 그런데 정작 시간이 많아진 지금은 여행 생각이 없다. 주변에서도 많이 물어본다. 여행 안 가냐고. 처음에는 조금만 있다가 또 한번 가야지 라고 답했는데, 요즘은 하루하루가 빨리 가서 여행 갈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떠난 유럽을 시작으로 15~20번은 해외에 다녀왔는데. 돈보다는 시간이 있으면 어떻게든 떠났었는데. 나는 왜 여행 갈 생각이 사라진 걸까? 답을 찾기 위해 그동안 나에게 여행이 어떤 의미였는지 돌아보아야겠다.
갓 스무살을 넘겨 떠난 첫 해외여행은 욕심이었던 것 같다. 남들 다 가니까. 그리고 나는 새로운 환경에 가보는거 좋아하니까. 그래서 죄송하게도 부모님 지원을 보태서 다녀왔다.
전역 후 다녀왔던 호주와 동남아 여행은 의무감이었다. 당시 나는 롱디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 여자친구는 나를 보러 한국에 여러 번 와주었다. 그래서 나도 가야만 했다. 학기 중 과외를 여러 개 해서 모은 돈으로 방학이면 해외로 나갔다.
대학 생활 후반기에 다녀왔던 실리콘 밸리 단기 연수는 호기심이었다. 대학 생활 내내 막연하게 창업을 가슴에 품고 살던 내게는 지원하지 않을 수 없는 기회였다. 운이 좋게도 항공권 반액까지 지원받을 수 있었고 덕분에 여유로운 마음으로 다녀올 수 있었다.
취업 후 다녀왔던 10번 가까운 여행은 보상 심리였다. 여자친구와 다녀온 여행들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목적도 없었다. 그냥 휴가 갈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여행으로 채워넣었다. 어떠한 설렘도 기대도 없었다. 나중 갈수록 그게 더 심해져서 출국 하루 전날 어디 갈지 정하고 항공권을 구매하기도 했다.
정리하고 보니 여행 전에 구체적인 목적 혹은 기대가 있어서 떠난 여행은 단 한번 뿐이었다. 실리콘 밸리 여행. 그리고 그 여행은 압도적으로 가장 좋았다. 이외에는 여자친구 혹은 친구들과 떠난 여행을 제외하고 혼자 떠난 여행들을 돌아보면 만족도가 10점 만점에 5점을 넘는 여행이 많지 않았다 (몽골 정도?). 그보다는 내가 지금 여기 왜 왔지?를 도착하고 나서야 생각했던 여행이 많다.
그렇다. 내게 여행은 순수한 즐거움은 아니었다. 특히 취업 후 다녀왔던 여행은 보상 심리로 떠났으며 실제로 보상을 받았느냐고 물어본다면 그렇지만도 않았다. 그저 당시의 현생에서 다소 무리하고 있었고, 그래서 잠시라도 멀리 떠나서 도망갈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제대로 알아보지도 준비하지도, 어떤 기대를 가져야 할지도 모른 채 떠났던 것이다. 그러니 만족할 확률이 낮았던 것이다.
돌아와서 요즘 여행 생각이 크지 않은 이유는 결국 현생이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초점을 남이 아닌 내게 둠으로서 자연스럽게 속도 조절이 가능해졌다. ‘누가 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린 채로 미친듯이 달리다 탈진해버리는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노력 중이다. 매주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하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한 걸음씩 더 떼어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치지는 않되 지루하지도 않다. 그래서 나는 지금 여행 생각이 나지는 않는다.
이제는 보상 심리 혹은 의무감에 휩싸여 떠나는 여행은 가지 않고 싶다. 다만 2019년에 실리콘밸리행이 그랬던 것처럼, 운명처럼 나를 끌어당기는 여행이 다시 등장한다면, 그때 망설임 없이 다시 한번 떠나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