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빛날 수 있는 환경은 무엇일까?
여자친구 회사(이자 나의 첫 직장) 연말 행사가 SO(Significant Others; 가족이나 애인 등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외국계는 영어를 너무 많이 쓴다 ㅎㅎ) 동반 행사여서 지난 주말 부산에 다녀왔다. 덕분에 시그니엘 부산 스위트룸에서 2박 하는 호사도 누리고, 여자친구와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
오늘은 둘째 날 저녁에 청사포에서 조개구이를 먹으며 나누었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 정리해서 기록해두려 한다. 요지는 사람마다 갖고 있는 핵심 역량이 생각보다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심지어 같은 회사에 입사해서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더라도 그렇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같은 성과를 냈더라도 개인마다 성과를 낼 수 있도록 기여한 기질 혹은 역량은 생각보다 많이 다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여자친구와 나는 같은 대학을 졸업했으며 1년 터울로 같은 전략 컨설팅 펌에 입사했다. 그렇지만 우리 둘은 장점이 너무 다른 사람이다. 우선 여자친구는 현재에 집중하는 능력이 강하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주변 사람들이 조장하는 분위기에 의한 압박감을 풀어내는데 능하다. 만나기 초반에 내가 우스갯소리로 안좋은 일이 일어나면 (기억이 안나지만 뭔가 인턴 면접같은 것에 떨어지면 어떡하지 정도였던 것 같다) 어떡하지 라는 말을 했다. 그랬더니 여자친구는 에잇 하더니 식당의 나무 책상을 세 번 두드렸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봤더니 나무를 세 번 치면 나쁜 운이 물러간다나. 처음에는 그냥 귀엽네 생각했다. 그런데 4년을 넘게 만나보니 이게 여자친구의 엄청난 강점이었다. 철저하게 본인이 통제할 수 있는 현실에만 집중한다. 일어나지 않은 일과 두루뭉술한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는다. 이게 글로 쓰니 실감나게 표현을 못했는데 때로는 여자친구는 가상현실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쓸데없는 걱정은 다 쳐내고 없는 그런 세상이랄까. 그래서 여자친구는 회사 일을 잘하면서도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컨설팅 펌은 기본적으로 불안감이 높은 사람들이 서로를 비교하며 극한으로 치닫고 결과적으로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갈아넣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고려하면 정말 특별한 능력인 셈이다. 나도 같은 회사를 다녀봤기에 더더욱 그렇게 느낀다.
한편 나는 No를 잘하는 것이 특징이다. 살아오면서 유별나게 많이 No라고 말했던 것 같다. 대부분이라면 그냥 더럽고 치사해서라도, 귀찮고 힘들어서라도 그냥 둘 법한 일도 나는 원하지 않거나(개인적으로) 납득되지 않으면(일적으로) 거절하고 거부했다. 우선 개인의 커리어에서도 끝없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관심 있는 곳에 가보고 아니다 싶으면 미련없이 No 한다. 그냥 입사했으니까 덮어두고 하루하루 잘 넘어가면 만사형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그걸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고민한다. 그래서 그리 똑똑하지 않은 머리에도 과분한 기회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업무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냥 이 순간 지적받지 않고 넘어가면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일이 무슨 의미고 어떤 가치를 주고 있는지를 고민한다. 상사나 담당자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고 넘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그래도 계속 그렇게 한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미 지쳐서 타협했을 법한 경험들을 거쳐 왔지만 아직 나는 순수한 일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아니라고 해야 할 때는 분명하게 표현한다.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짧은 시간 동안 압축적인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쓸데없는 일을 극단적으로 거부하고 굳이 시키지 않아도 피곤하게 고민하고 설득했으니까.
아무튼 돌아와서 여자친구와 나는 이렇듯 핵심적으로 가진 자질이 정말 다르다. 나는 여자친구처럼 불안감을 탁월하게 통제하지 못한다. 오히려 처음 컨설팅을 시작했을 때는 다른 동료들보다 더욱 불안감이 컸다. 입사 초반에는 발 뻗고 자본 기억이 없다. 매일 놀라며 일어나서 별다른 소식이 없을지 확인하곤 했다. 반면 여자친구는 웬만하면 그냥 흘러가는대로 몸을 맡긴다. 사실 여자친구는 스스로의 직업적 삶에 만족하고 있기에 큰 단점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가끔 답답해할 때가 있다. 특히 최근 회사에서 반기평가가 있었는데 여자친구가 조기승진을 충분히 할 만한 성과를 보여줬음에도 아쉽게 그러지 못했을 때 그랬다. 이유를 들어보니 매일 붙어 일하는 동료들에게는 탁월한 평가를 받음에도 가끔 보는 파트너들이나 고객사에게 존재감이 조금 더 있으면 좋겠다고 한다. 아마 여자친구가 불편한 말이지만 본인이 믿는 바가 있을 때 몇번 높은 사람들에게 질러 봤으면, No라고 해 보았으면 존재감이 각인되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같은 직장에 다녔고 심지어 비슷한 수준의 평가를 받았다. 앞서 말한 내용을 조금 다르게 정리해보면 특정한 환경에서 핵심 성공 요인으로 작용하는 자질이 여러 가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컨설팅에서는 압박감이 심하면서 본인만의 독립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한다. 따라서 압박감을 잘 다스리는 능력과 독립적인 결과물을 만드는 능력 두 가지가 중요하다. 이때 두 가지를 모두 독보적인 수준으로 가지고 있지는 않더라도 그 환경에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작성한 내용의 시사점을 뽑아보려 했는데 실패했다. 이렇게 저렇게 써 봤는데 조금 억지인 것처럼 느껴져서 지웠다. 솔직히 그냥 좀 신기했다.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이 같은 기회를 잡고 비슷한 성과를 냈다는 것이. 그러면서 궁금함도 들었다. 컨설팅이 각자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맞을까? 이미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다른 길을 뚫어보고 있지만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 더 명료했다. 아무튼 나라는 사람이 가장 빛날 수 있는 환경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고, 그곳으로 스스로를 데려가려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