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보다는 페이스
5년 전까지만 해도 무기력하거나 컨디션의 기복을 호소하는 개인들에게 '의지의 부족'을 지적하는 콘텐츠가 많았다. 가정과 학교는 물론, 서적이나 방송에서도 누구든 불굴의 의지가 있으면 성공한다는 류의 메세지가 주류를 이루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3년~5년 전부터 흐름이 조금 바뀌었다. 요즘은 '의지를 갖고 해봐'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신 심리학과 뇌과학이 유행하고 있다. 이들 학문에 배경을 둔 크리에이터들은 '마음의 작동 원리'를 먼저 설명한다. 특정한 환경, 자극, 행동이 우리의 심리 혹은 호르몬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려주고, 나쁜 영향을 주는 환경, 자극, 행동을 변화시켜 볼 것을 권하는 방식이다.
의지를 탓하지 않게 된 것은, 의지가 곧 솔루션인 것처럼 얘기하지 않게 된 것은 좋은 변화라고 생각한다. 우선 의지 = 자연스러운, 무의식적인 생각과 행동의 흐름을 거슬러, 의식적으로 의도한 대로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힘 이라고 가정해본다. 가정에 동의한다면, 의지를 발휘하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다. 자연스러운 흐름을 거스르는 일은 고통스럽다. 따라서 자주 사용하게 되면 지치기 십상이다.
개인적으로는 의지의 덕을 많이 보았다. 어느 무렵에는 스스로의 장점을 '안되는 걸 어거지로 어떻게든 되게 하는 거에요'라고 할 정도였다. 특히 단기적인 분수령에서 의지의 초인적인 힘을 종종 체감했다. 입시, 전과, 취업 등등. 나는 매번 일반적이지는 않은 방식으로, 안될 것 같은 일들을 어찌저찌 해치워왔다.
그래서 나는 의지로 모든 것을 때우려 하는 나쁜 습관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이 습관은 커리어 초기의 내게 많은 실패를 안겨주었다. 첫 직장인 맥킨지에서도, 두 번째 직장인 스타트업에서도 나는 매 순간 초 긴장상태에서 100%, 아니 120% 모드를 가동했다. 이번에도 초반에는 효과가 좋았다. 내 의도대로, 비교적 빨리, 잘해나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두 번의 직장에서 모두 1년 만에 번아웃을 경험했다. 모든 신경이 지쳐버린 느낌이었다. 또한 기존의 관성은 나를 계속 채찍질하고 있었다. 마치 전속력으로 달리다 갑자기 멈춘 말이 된 기분이었다. 덤으로 스스로가 내리는 채찍질을 맞으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실제로 나는 첫 2번의 직장생활을 통상적인 기준에 비해 빠르게 정리했다. 당시에는 원래 하고싶었던 창업으로 자연스럽게 가는 과정이라 합리화했지만, 명백히 페이스 관리에 실패한 것이었고 더 오래 다녔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러고 시작한 창업. 1분기에 진행했던 프로젝트에서, 이번에도 제 버릇 개 못주듯 우악스럽게 달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3개월도 되지 않아 지쳤음을 확인했다. 아마 이전 직장 생활들에서도 이미 지친 상태에서 오랜 시간을 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뇌가 견디지 못하고 번아웃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이렇게 생각을 끄집어내서 적는 것은 처음이지만, 두 번째 아이템으로 코칭을 하고 있다. 대상은 나와 같이 페이스 관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미 지쳐버렸거나, 지치기 직전 무서워서 찾아왔거나. 대부분 의지로 여기까지 견뎌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는 이들에게 더이상 의지에 의존하지 말자고 말한다.
그보다는 지금의 내게 알맞는 페이스를 찾고, 서서히 지속 가능한 수준까지만 올려보는 방식으로 가보자고 권한다.
의지는 레이싱 게임의 '부스터 아이템'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지속 가능한 최대 속도, 페이스는 따로 있는데, 가끔 위급한 상황에 발휘하는 힘이 곧 의지다. 그런데 의지의 힘에 한번 맛들리면, 페이스가 무너진다. 그리고 한번 무너진 페이스는 스스로 회복하기 어렵다. '의지, 부스터를 켰을 때의 나'와 무의식 중 비교하게 되고, 이는 무기력감 혹은 압도감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점차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다.
냉정하게 본인의 지속 가능한 페이스를 파악하고, 그에 맞춰 목표와 계획을 수립한다면 긴 레이스를 완주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또한 장기 레이스는 완주만 하면 대부분 성공한다 (다들 중간에 포기하기에). 적어도 후회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의지는 정말 위급한 상황에 쓰는 필살기이고, 아무 때나 남발하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