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태 : 비행 중
출•퇴근 시간 중 지하철에서 보내는 시간 2시간.
나는 매일 지하철을 타고 여행을 떠난다.
많은 사람이 붐비는 지하철이지만 나에게는 오롯이 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일과 육아로 인해 시간을 침해당하지 않는 유일한 공간. 하지만 매일 떠나는 지하철여행이 마냥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너무 피곤한 날은 자리에 앉자마자 잠이 들어 1시간을 통째로 날린다. 퇴근길은 언제나 자리쟁탈전이다. 2년간의 여행을 통해 난 두 가지를 깨달았다. 첫 번째는 지하철에서도 할 수 있는 게 너무나 많다는 것. 두 번째는 유튜브, 넷플릭스는 절대 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
언제부터인가 지하철에 앉아있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긴 시간 앉아있다 보면 정말 많은 사람이 스쳐간다. 딱히 그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거나 하지는 않는다.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사람, 졸다가 옆사람 어깨에 인사를 하는 사람, 공부하는 사람, 언제나 평범한 일상이지만 나에게 있어 지하철은 재밌는 곳이다.
처음 회사에 취직했을 때는 그 유명한 1호선을 타고 대한민국에서 사람이 가장 많다는 신도림을 거쳐 출근을 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 타고 다니는 5호선은 정말 쾌적한 편이다. 나는 사람들을 볼 때 신발을 가장 먼저 본다. 20대 초반에 나이키 매장에서 잠깐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 얻은 버릇이다. 지금도 지하철 자리에 앉으면 어떤 이쁜 신발이 있는지부터 찾아본다. 지하철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아래로 깔기 적당한 높이의 좌석으로 되어있어 다양한 종류의 신발을 많게는 30켤레 이상 볼 수 있다. 나는 패션의 완성은 신발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왜 신는지 모르겠는 이상한 신발부터 형광빛이 오늘 처음 신은 듯 반짝거리는 반딧불이 에디션, 두 사람은 붙어서 당겨야 벗겨질 것 같은 무릎까지 오는 부츠까지 나에게 있어서 지하철은 대형 신발 쇼핑몰이다. 정작 내게는 신발이 세 켤레밖에 없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좋아하는 내게 이어폰은 심장과도 같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꾸 깜빡깜빡하는 바람에 이어폰을 두고 올 때가 많아졌다. 놓고 옮을 깨닫는 순간은 항상 ‘이 버스를 놓치면 지각인데’를 깨닫는 순간과 맞닿는다. 버스를 타면 이어폰을 끼는 버릇 때문인 듯하다. 이어폰이 없으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이어폰이 없을 때는 온전히 지하철만이 내는 쇳소리를 들을 수 있다. 사실 소음 중에서 그나마 좋아하는 백색소음이 지하철 소리다. 하지만 아무리 지하철 소리가 좋아도 이어폰이 없으면 마음이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다. 음악을 들을 때 가장 좋은 순간은 음악의 비트와 지하철의 박동소리가 어우러져서 생기는 무형의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 때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유행하는 노이즈캔슬링 음향기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 상당히 이질적이다. 나만 홀로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면 괜히 우울해진다.(10대때는 그 순간을 꽤 즐겼었다) 적당한 소음이 주변환경과 어우러져 세상 어딘가로 가는 기분을 만들어주지만 여행을 가는 내내 전화통화를 하는 빌런은 정말 용서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역시 1호선에 비하면 5호선은 하루종일 조잘거리는 아이들이 있는 우리집과도 같다. 내가 앉은 구석탱이 자리는 공연을 시작하기 직전의 거대한 콘서트홀이다. 비록 맨 뒷자리일 지라도 공연이 시작되면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에 압도당할 것이다.
해외여행을 많이는 못 가본 탓에 나는 비행기도 이코노미 좌석밖에 타보지 못했다. 앞자리와 부딪힐 것 같은 좁은 공간이지만 밥도 먹고 책이나 영화도 볼 수 있고 잠도 잘 수 있다. 비록 지하철에서의 취식은 상당히 눈치가 보이는 행위지만 지하철 좌석도 자거나 책을 보기에 상당히 괜찮은 공간이다. 졸 때는 머리를 잘 컨트롤해야 하지만 옆에 기둥이 있다면 그나마 안심이다. 가끔은 옆자리에 어깨가 깡패인 사람들이 와서 내 영역을 침범하지만 괜찮다. 나는 어깨를 접을 수 있다.(좁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아직 해결 못한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짓이다. 아직은 내 성격상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비루한 내 글씨체를 보인다거나 이상해보일지 모르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매우 어렵다. 그나마 글은 나에게 카톡 보내기로 누군가와 연락하듯 누가 봐도 자연스럽게 쓰고 있지만 그림은 아직 못그리겠다. 멈춰있던 지하철이 출발할 때면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 속력을 내는 느낌이 난다. 소리도 매우 비슷하다. 나는 비행기 못지않은 지하철을 타고 여행 중이다. 언젠가는 어딘지 모를 목적지에 도달할 것임을 알기에 나는 오늘도 순항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