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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내가 좋다 Mar 04. 2024

그림을 꽃피워보자

나의 취향표류기-보테니컬아트

    작년 여름이었다.

남편과 크고 작은 다툼이 있고, 생활이 뭔가 맘에 들지 않을 무렵.

초등 6학년인 아이는 이제 나의 손이 그렇게 까지 필요 없을 만큼 잘 성장해 있었다.

무료하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고, 뭔가 모르게 억울한 심정이 한동안 나를 지배했다.

아… 이런 게 갱년기인가? 아니면, 우울증?

뭔가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창의적으로 넓혀가며, 더 깊이 있고 꾸준하게 부지런히 가라앉아갔다.

( 나의 장점은 뭔가 하나를 깊이 있게 잘 들이 판다는 점이다. 하필 또 이럴 때는 인내심도 끝내준다. )


  그렇게 여름이 끝나갈 무렵, 나는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아무리 생각해 봤자, 원인 같은 것도 해결책 같은 것도 찾을 수 없겠구나.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

석 달 열흘 밤잠 설쳐가면서 시무룩하게 생각하고 생각하는 동안 뭘 하고 싶은 건지,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산뜻한 무엇인가로 내 생활을 채우고 싶다는 애매모호한 욕망이 나에게 생겨있었다. 그건 확실했다.

그래… 그렇다면 확실한 것부터 일단 하자.

( 나이키가 세계적인 이유를 이제 알겠다. ‘Just do it’ 이라니. 딱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


  예쁜 것으로 내 생활을 채워보자. 예쁜 것, 예쁜 것, 예쁜 것…  근데 그게 뭘까?

내 얼굴을 가꿔볼까? 거울을 보자… 흠… 그걸로는 좀 어려울 것 같다….ㅠ.ㅠ

집을 예쁘게 꾸며볼까? 그럴려니 일이 너무 많다… 흠… 그럼 패스.

예쁜 꽃꽂이를 배워볼까? 후들후들… 레슨비와 꽃값이 한 몫하는군… 그럼?

가성비가 좋은 예쁜 것으로 타협. 좋아!! 꽃을 그려보기로 했다.


  내가 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먹지도 못하고 비싸기만 한 꽃.

누가 선물로 주더라도 집에 가져다 놓으면 우리 집 분위기에 맞지 않는 데다 한 이삼일만 지나도 애매하게 시들어있어

이걸 버려야 할지, 아니면 좀 더 두고 봐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 바로 그 꽃.

왜 그 여름에 나는 꽃을 떠올렸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그저  생명력 있고 다양한 색과 모양을 갖추고 향긋한 데다 서로 다른 개성 있는 향기까지 더한 생명체.

내가 보호해 줘야 할 것 같은 가녀린 느낌에다 우아하거나 산뜻하거나 귀엽고 발랄한 느낌까지 골고루 갖춘 그것.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나의 무뎌져 있는 오감을 골고루 자극해 주는 느낌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렇게 보태니컬 아트 수업을 가장 싸고 가장 편하게 들을 수 있는 곳을 찾아 동네 문화센터에 등록했다.

중고등학교 미술시간 이후 단 한 번도 그림이라고는 그려본 적이 없는 데다가

손에 발이 달려있는 나로서는 그림 수업을 들어본다는 것 자체가 무척 대단한 도전이다.

취미로 그림을 그려보겠다고 오시는 분들일 테니 아마도 수강생들은 그림에 조금씩은 조회가 있는 분들일 가능성이 높고,

그 사이에서 나의 그림을 오픈했을 때 망신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자동적으로 떠올랐지만,


‘가보자, 뭐. 망신스러우면 뭐 어떠리. 나만 즐거우면 됐지.‘


라고 무척이나 대범한 척 나 자신을 세뇌하면서 떨리는 마음으로 첫 시간에 출석했다.

헐…  나 말고 70 중반의 할머니 두 분이 출석 인원의 전부였다. 게다가 그 두 분도 그림은 완전 처음이신 분들.

뭔가 안도가 된다. 꼴찌도 동점자가 많으면 뭔가 당당해지는 기분이랄까?

아무튼 그렇게 선긋기부터 시작한 수업을 8개월째 듣고 있다. 그래서 지금 나의 실력은 어떠냐고?



짜잔~~!

세상에 금손이신 분들이 워낙 많다 보니 엄청난 실력은 아닐 수 있지만, 나에게는 엄청난 발전이다.

아니, 발견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

나는 한 번도 내가 그림을 잘 그릴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하루에 한 시간씩 8개월을 그렸더니, 제법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아니, 꽤 괜찮아 보이기도 한다.

나에게는 나 스스로도 몰랐던 무엇인가가 있는 셈이다.


예쁜 것으로 내 생활을 채우고 싶다는 소망은 나의 노력스위치를 켤 수 있게 하고

잊고 있었던 오감의 세밀한 기능들을 깨워주는 것 같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림을 그리면서 나도 모르게 네다섯 시간을 집중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시간이 빨리 가는 일이 바로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나 보다.

그걸 40대 중반에야 알았네. 참 즐거운 발견이다.

내 인생을 풍요롭고 예쁘게 만들어 줄 심지어 가성비도 높은 즐거움 하나를 찾은 날.

작년 7월의 첫 금요일을 나는 그렇게 기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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