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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내가 좋다 Mar 11. 2024

달디 달고 달디 단 밤양갱

나의 취향표류기-한식디저트,  그 맛의 기억 1

  

  예쁘고 기분 좋은 것을 찾아보고자 시작해 본 또 다른 시작은 그냥 아무 생각없이 시작됐다.

교보문고에서 보고 싶은 책들을 고르다가 우연히 본 한식디저트 책이 그것이었는데,  

다른 책들에 비해 초간단한 설명과 뭔가 살짝 비어보이는 것 같은 단순한 메뉴구성으로 된 그 책은 뭐랄까…  보고 따라할 수 없을 것 같은 메뉴였다.

요즘 홈베이킹을 잘하는 금손들은 너무나 많지만, 떡과 한국식 다과를 직접 만들고 다도와 다화를 함께 하다니…

내가 집에서 책을 보고 따라해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않았지만, 차분하고 정갈한 멋이 머리 속을 상쾌하게 만들어 줄 것만 같다는 느낌이다.

일단 책을 살까…? 그런데 이 책을 보고 내가 따라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책을 사가면 뭐하지?

몇 단계의 의식흐름을 거친 나는, 교보문고 한 귀퉁이에 앉아 책을 쓴 분이 운영한다는 공방을 검색하고 카톡으로 수강료문의를 했다.

답장은 매우 친절하게도 바로 왔고, 전업주부인 나로서는 좀 많이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순간 갑자기 확 망설여졌지만, 정확히 딱 5분만 생각해 보자… 흠… 신청할께요!

가성비를 따지고, 뭔가 하나를 시작하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나로서는 최근 10여년 간 한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일주일 후 우연히 교보문고에서 만난 책의 주인과 하얀 테이블이 인상적인 소담한 공방에 앉아있었다.


  내가 신청한 첫 수업은 작년 11월이었는데, 처음 배울 수업은 밤양갱이었다.

가을 밤이 맛있으니, 제철 식재료를 이용하는 차원의 메뉴구성이라고 했다.   

양갱이라… 사실 나는 양갱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달아서 집에 있어도 굳이 먹지 않는 메뉴 중 하나다.

하지만, 내가 이 곳을 찾은 이유는 양갱을 먹고싶어서가 아니니까 고민하지 않고 고고~!!

수업은 선생님 외에 나와 다른 한 사람 셋이 전부다.

달랑 두 사람이 수업을 듣다보니 뭔가 이야기를 건네야 할 것만 같다. 그런데 이런… 완전 엠쥐인 20대 초반의 여자분이다.

살짝 ‘센캐’로 보이는 그녀. 뭔가 쓸데 없이 말을 붙이거나 만난것도 인연이라며 통성명 같은 걸 하는 건 40대인 나의 상식이지 그녀에게는

실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 나는 신선한 자극과 만남을 원했지만 막상 마주친 새로운 상황과 사람 앞에서 긴장하고 있었다.

목례 조차도 하지 않고 본인의 요리 그릇에만 집중하는 그녀에게서 나는 뭔가 거대한 거리감을 느꼈다.

언뜻 언뜻 선생님이 질문하는 말에 답하는 내용으로 들어볼 때 그녀는 무려 4개국어를 하는 외국어능력자에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으며,

미국에 있는 로스쿨 진학예정이라고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집에서 ‘요리나 살림같은 걸’ 하는 적이 없어 전업주부라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으며,  오늘 수업에 온 이유는 할머니 생신 선물로 양갱 선물을 하고 싶어서라고 했다.

미국 생활에 대한 적응도 원래 미국에도 집이 있어 왔다 갔다 살아왔기 때문에 전혀 어려울 것은 없다는 그녀의 담담한 대답과 함께  

공방 선생님도 본인이 외국에서 공부할 때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수업은 계속 흘러갔다.


   서로 서늘한 거리감을 유지하긴 했지만, 정해진 순서에 맞춰 우리 세 사람의 밤양갱은 잘 만들어져갔다.

 다만, 나의 몸과 마음은 그리 편안하고 기분 좋진 않았다. 부담스러운 가격의 수업료까지 내고 일부러 참석한 그 자리에서 나는 뭔가 긴장되고,

그들의 대화에 낄 수 없을 것 같은 이상한 기분으로 표시나지 않게 두 사람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요리라고 잘 될 턱이 있을까. 찐양갱이라고 해서 약간은 찰떡 같은 느낌의 생소한 양갱이 있는데, 그 양갱의 핵심은 밤이 중간에 잘 들어가 박히도록

예쁘고 균일하게 컷팅하는 게 포인트였다. 하지만 잔뜩 긴장한 나는 무려 10년도 넘게 칼질과 요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똑바로 자르는 것이 어려웠다.

물론, 옆자리의 아가씨도 나와 비슷한 실력이긴 했지만, 나는 왠지 그녀가 4개국어 실력을 키우는 동안 밥을 열심히 해 왔다면 이런 건 좀 더 잘해야 하는 게

아닐까 쓸 데 없는 경쟁심? 창피함? 그런 마음이 스물스물 생겼던 것 같다.  아무튼 그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나의 첫 다과 수업은 끝이났고 짠~!!



  여기서 나의 첫 다과수업이 끝났다면 아마도 나는 다시 그 곳을 찾지는 않았을 것 같다.

수업이 끝나면 사진을 찍고 따끈한 차와 함께 그날 만든 디저트를 먹으며 차담을 나누었는데, 엠쥐 그녀가 나에게 처음으로 먼저 질문을 던졌다.

( 수업 중에도 다른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모두 긴장을 풀기 위한 나의 수다였을 뿐 그녀가 나에게 무엇인가 먼저 말을 건 일은 없었다.  )


“ 아기를 키우는 건 어때요? ”


전업주부라는 건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얼어있었던 것 같은 나는,

이건 예의상 묻는 질문인걸까? 대충 짧게 답변하고 넘겨야 하는 걸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듯한 눈초리다. 나의 대답에 정말로 집중하고 있는 듯한…

수업시간 내내 나는 뭔가 두 사람이 나누고 있는 경험이나 생각에 전혀 끼어들 수 없고, 주부로 사는 시간 동안 어디 먼 곳에 세상과 단절된 체로 살다가

시간이 훌쩍 사라져 버린 사람같이 소심해져 나도 좀 더 멋져 보이는 내 이야기가 있다면 좋을텐데… 싶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의외로 그녀는 나의 경험에 대해, 아니  동석한 세 사람 중 나만 경험해 본 일에 대해 ( 공방선생님은 결혼했으나 아이가 없으셨다 )

듣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가 전업주부란 집에서 밥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나 보다… 라고 혼자 지레 주눅 들어 있었던 것일 뿐,

사실 그녀는 본인만의 이야기를 이미 편안하게 하고있었고

내가 어설프게 나를 꾸미고 싶어하는 말이 아니라, 나만 가지고 있었던 내 이야기를 꺼냈다면 기꺼이 경청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묘하게 나를 긴장시켰던 살얼음이 스르르 녹아 없어지는 듯 느껴진다. 다시 뇌가 말랑말랑 해지고 최대한 그녀에게 성의있게 대답해 주고 싶다.  

담백하지만, 십여 년 넘게 내가 내 직업을 접고서라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의 생활이 무엇이었는지 나도 나의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 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일? 전 그랬어요. ”

그녀가 순간,


“ 오~ ”

하고 눈이 커진다. 그리고는,


“ 우리 엄마도 그랬을까요? 갑자기 물어보고 싶어졌어요.”

라며 혼자 고개를 크게 끄덕끄덕 한다.


나는 그녀의 대답이 몹시 고마웠다.

내가 멋져 보이는 대답을 하지 못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고로 진지한 경험담이긴 했다.

그리고 나만의 느낌이었을지 몰라도, 그녀가 나의 경험을 공감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이후 잠시 동안 나는 생각보다 더 재미있는 대화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배운 독일어 몇 마디를 더듬더듬 기억해내자 독일어 전공이라는 그녀는 전공자 아닌 사람들 중에 그런 말을 알고 있는 사람

처음 본다며 나를 칭찬해 주었고, 나는 그녀가 프랑스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언어의 구조적인 특징을 통찰하고 있다는 점에 감탄했다.  

그리고 각각 20대, 30대, 40대인 우리는 서로 약간씩 다른 연애와 놀이 문화에 대해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고

미혼, 기혼이지만 딩크, 전업주부에 아기 엄마라는 서로 다른 상황으로 사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그렇게 그날의 찻자리에서 나눈 시간은 내가 만든 예쁘고 먹음직스러운 밤양갱처럼 달디 단 기억으로 남았다.

삐뚤빼뚤하게 잘못 자른 밤양갱도 뭔가 다시 보니 예뻐 보이고,

너무 달아서 싫었던 양갱이지만 뭔가 오늘 만든 밤양갱의 단맛은 은은하게 고급스러운 것도 같다.


  그날 이후 나는 한달에 한번 그 공방을 찾고 있다.

물론 더 자주 가고 싶기도 했지만, 역시나 주부인 나로서는 가는 날마다 내야하는 수업료가 살짝은 부담이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라도, 부담스러운 수업료를 좀 내더라도 당분간은 가 보고 싶은 곳이 되었다.  

한 달에 한번 나는 새로운 레시피를 배우고,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또 어떤 맛의 기억을 만들어 내게 될까…

한식디저트의 달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나에게는 매달 배우는 새로운 레시피에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이라는 비법이 더해져  특별한 맛의 기억이 쌓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맛과 멋이 더 그윽해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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