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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레 Sep 06. 2023

부모 이혼 추진위원회

혼인 신고를 끝내고 친정 부모의 이혼서류를 준비했다. 오래도록 꿈꿔온 수경의 숙원사업이었다. 남들 다 하는 이혼이라고, 아빠가 없는 게 더 행복할 것 같다고 수 십 년을 말해왔건만. 그때마다 엄마는 자식들 결혼시키고 속 시원하게 이혼하겠다며 미뤄왔다.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 말에 참아온 세월이었다. 아빠의 손을 잡고 걸어 들어갈 때 가슴이 뭉클했던 것은 슬퍼서가 아니다. 엄마가 정해 놓은 지긋지긋한 결승선을 드디어 통과했다.


어릴 적부터 아빠는 술만 마시면 가족들을 앉혀놓고 밤이 새도록 말을 하고 소리쳤다. 다음날이 시험이든, 운동회를 하든 상관이 없었다. 밖에서는 순한 양이었으나, 술을 마시고 집에 오면 폭군이었다. 이웃이나 친척에게 그의 술주정 얘기를 하면 믿지 않을 정도였다. “누굴 때리기를 해, 딴 년이랑 바람을 피워. 큰 잘못은 아니네.”라는 고모의 말에 이 정도는 모두 당하고 사는 것인가 생각했다.


눈과 귀를 막는 어른들의 말에 수경은 스스로 깨우치게 되었다. 어느 집에나 불행이 있고, 그 불 행은 같은 모양이 아닐 수도 있음을. 우리 집의 불행이 아빠 모양이라면 그만큼을 도려내고 싶었다. 자식들 분가하고 손주가 태어나면 철이 들 거라는 옛 말도, 빛 좋은 개소리라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아빠는 여전히 술을 마시면 새벽에도 결혼한 자식들에게 전화를 했고, 엄마를 깨웠다. 그 바람에 엄마는 일 년에 몇 번씩 자식들의 집으로 피신을 하고 쪽 잠을 잤다. 한 겨울에 낯선 거리를 서성였을 그녀의 발이 차갑게 얼어있었다.


이혼 서류를 읽어본 아빠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난 안 해. 네 엄마는 한데?” 결론과 질문을 동시에 말하는 걸 보니 당황한 것 같다. “나라도 이혼시킬 거니까, 도장 찍어.” 수경이 결혼하고 나서야 아빠는 딸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그의 영역은 집뿐이란 걸 그녀가 눈치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혼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아?” 그가 버럭 화를 냈다. “이제 자식들도 다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데, 나이 든 부모 이혼시키는 게 어려울 거 같아? 누구 따라갈래? 같은 말도 필요가 없다고.” 버티고 밀어내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부모와 자식 간에 회유와 협박이 오갔다. 미친 사람처럼 게거품을 물었지만 힘으로 도장을 찍게 할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두 번째 방법으로 진행해야 했다. 이기지 못하고 돌아온 수경에게 남편은 고생했다며 이혼 전문 변호사를 알아놨다고 했다. 상담이나 받아보자는 말로 엄마와 약속을 잡았다. 통화를 하면서 느낌이 서늘했다. 엄마가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벽녘쯤 전화가 울렸다. 변호사를 만날 수 없다는 엄마의 말에 수경은 짜증과 답답함이 몰려왔다. 입으로는 이혼을 수십 년째 했으면서 왜 못하는 거냐고 화를 냈다. “주변에 이혼녀들이 얼마나 힘든 줄 아니? 친구 중에 남자가 있어도 소문이 나고, 누구 하나 편들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남들 눈에 어떻겠니. 우리를 어떻게 보겠어.”


소문의 빅 마우스로 활동하던 그녀는, 그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음을 눈치챘다. 남들 눈이 가장 중요한 여자가 다시 창살 없는 감옥으로 들어간다. 어쩌면 저건 징글징글한 사랑일지 도 모른다고 수경은 생각했다. 그날 이후 엄마는 딸이 손목을 붙잡고 이혼 법정으로 들어갈까 봐 아빠 얘기를 하지 않는다. 꿈꿔왔던 부모 이혼 추진위원회는 이로써 시작도 못하고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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