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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정 소녀 하이디 Jul 28. 2019

영화 골든 슬럼버를 통해 들여다본 이웃나라 일본

문제 해결 방식을 보면 우리와 이 나라 사이의 차이가 보인다.

살다 보면 누구나 문제에 맞닥 드리기 마련이다. 어느 곳에 살던 어떤 일을 하던 누구나 문제에 봉착하면 그것을 해결하지 이리저리 해결책을 찾기 마련이다. 5년째 일본에서 일하고 살면서 나는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로 자주 출장을 다닌다. 업무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봉착하고, 그리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이곳 일본의 "문제 해결 방식"과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결론을 내리는 상황"이 한국인의 그것들과 유난히 다르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어떻게 다른가?

영화 골든 슬럼버를 통해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과, 해결이 된 상황을 정의하는 관점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영화 골든 슬럼버는 일본의 소설가 이타카 코타로의 소설 "골든 슬럼버"를 한국식으로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리메이크작 한국의 결말은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려버린 문제적 상황에서 도망쳤던 주인공이 다시 돌아와 진짜 범인을 밝히면서 끝이 난다. 일본에서 써진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진짜 범인을 밝히지 않고 사람들이 신분을 감춘 채 사람들이 아무도 그를 찾을 수 없는 어떤 곳으로 떠나는 것을 결말로 한다.


단순히 한 영화와 소설의 결말이라고 하기에는 그 차이가 주는 의미는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매우 잘 대변한다. 우리는 문제 해결이라 하면 어떻게든 "끝을 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은 문제를 "원천적으로" 고치고 없애버리는 것에 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문제가 인식되면 문제를 꼭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그걸 위해 싸움과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에 반에서 일본은 문제가 원천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지 그렇지 못한 지 일단 판단을 한다. 그리고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거나, 그 문제가 너무 커서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것이면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거나 덮어 버리거나, 본인이 피해자가 되는 상황에서도 그냥 피해버리는 방법을 택한다. 우리에게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도망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것이 그들에게는 최고의 문제 해결법일 수 있다. 적어도 골든 스럼버의 결말을 통해 드러나는 한국과 일본의 문제 해결 방식과 상황 종식을 정의하는 기준의 차이점이다.


회사에서 벌어지는 문제 해결 상황을 봐도 내 한국의 동료와 일본 동료의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하는 방식의 차이는 영화에서 발견한 결말의 차이와 다르지 않다.


왜 다른가?

문제를 해결하려면 "원인"을 찾아야 한다. 일본인에게는 그 원인이 "무엇"이 아니라 "누구"인지가 더 중요하고 민감하다. 그러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를 하는 것이 자신의 "명예"에 연결시키지는 이곳 사람들의 생각 때문에 누구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사실 우리의 의도는 잘못된 "무엇"을 찾아내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나, 그들에게는 "누구"를 찾아내어 잘못을 묻는 것으로 보이기에 이들은 상황을 덮는 것을 택한다. 반면 한국의 내 동료들은 문제가 있으면 더 들어내 놓고 이야기하는 편이다. 일본인이 보았을 때 한국인은 상당히 비판적이고 부정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한국인은 "문제"는 풀어야 하는 것이기에 무엇이 잘못되었고 누가 잘못했는지 공론화하는 것이 힘들지만 꼭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으로 넘어갈 수 없다.


일본에서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사람이 문제의 원인이 되는 상황도 종종 생긴다. 내가 맡았던 프로젝트에서 문제점을 발견했을 때 나는 프로세스가 문제였기에 그것을 고치고 싶었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다 보니, 기존의 주문 프로세스를 사용하면 새로운 고객이 불편한 상황이었다. 나는 오래된 프로세스가 문제의 원인이라 생각했고, 새로운 프로세스를 만들어 달라고 유관 부서에 요청했다. 담당자는 내가 본인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말이라도 한 것 마냥 새로운 프로세스를 만드는 것을 거부한다. 그때 나는 한 동료로부터 조언을 들었다. "ㅇㅇ상, 먼저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한 다음에 일을 요청하면 말을 잘 들어줄 거예요." 동료에 따르면 행여나 문제가 있을 때 "책임"져야 하는 것들이 생길까 일본인들은 적극적으로 문제를 드러내고 해결하고자 하지 않는다고 한다. 프로세스가 문제의 원인이 되는 이 상황을 해결하고자 하는 내가 문제의 원인이라는 것을 자처하고 나서야 사람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령 "누가" 잘못을 했을지라도 이들은 누가 누구인지 겉으로 내어 놓고 이의 제기를 하지 않는다. 동료의 설명에 의하면 일본은 역사적으로 국내에서 많은 전쟁을 겪었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내편이 되는 상황을 많이 경험했는지라, 오늘 누가 잘못을 했어도 그 사람이 나에게 훗날 복수할 수 있고, 그 반대가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으로 배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만히 상황에 맞게 행동하는 복지부동의 자세가 우리에게는 바꿔야 할 폐단이었으나 이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미덕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계속되는 우리와 일본의 차이

몇 해 전 한국에 촛불 집회가 있었을 때 나의 일본인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또 데모해요. 그렇게 한다고 뭐가 바뀌나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응, 달걀로 바위치기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바위를 깬 적이 있거든요".


한옥 마당 (출처: 조선일보) 과 일본의 장롱안 (출처: SUUMO 웹사이트)

일본식 전통가옥 마치야에 늘 하나쯤 있는 벽속 장롱 안을 들여다보면 평소 사용하지 않는 온갖 옷이며 이불들이 꾸깃꾸깃 넣어져 있다. 가끔 생활 정보 관련 일본 TV 프로그램을 보면 이러한 장면들이 보인다.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타타미 방안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장롱 안 풍경. 한국인이 생각하기에 치워야 할 것은 내다 버리는 것이 좋겠지만 이들은 집안 어느 곳에 그것을 숨겨버리는 것으로 내다 버리는 방식을 대체한다.


한국의 한옥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람들이 모이는 마당이 펼쳐진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오다가다 인사도 하고 이곳 한가운데 놓인 편상 위에 앉아 밥도 먹고 논쟁도 하고 그렇게 산다. 문제가 있으면 이곳에서 고성이 오가고 화해도 오가고 한다. 이곳은 문제를 드러내고 해결하는 장소이다.


리메이크 한국 영화 골든 슬럼버 vs 일본의 원작 소설 
마츠야 안의 장롱 vs. 한옥의 마당


우리와 일본의 문제 해결 방식의 차이를 상징하는 수많은 예들 중 하나이다. 가깝고도 먼 나라, 알다가도 모르겠는 나라, 일본에서 살면서 갖게 된 내 생각이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그냥 내 생각이지만 이 해석을 통해 "왜 우리와 일본이 역사 문제에 관해서 늘 평행선을 달리는 이유"가 이런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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