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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진영 Apr 07. 2021

인생을 반쯤 온 듯합니다.

만렙의 생활력을 가진 여자 이야기

미국의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이 '마이크로소프트'를 설립한 해, 영국의 록밴드 '퀸'이 <보헤미안 랩소디>를 발표한 해, 그리고 20년간 지속된 베트남 전쟁이 마침표를 찍은 해의 끝자락에서, 재이는 서울 노량진의 한 산부인과에서 와이와 케이의 큰딸로 태어났다.


조부모님께선 종종 재이의 손을 꼭 잡으시곤 "우리 재이가 아들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하셨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는 딸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와이는, 경기도 변두리 농사꾼 할아버지와 장사치 할머니의 큰아들로 태어나 2남 2녀 중 유일하게 대학 교육을 받은, 부모의 기대를 한가득 짊어진 청년이었다. 지인의 소개로 사범 대학을 다니던 케이를 만나, 4년의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 국민학교 교사였던 케이는 결혼과 함께 직장을 그만두고 자녀를 셋 낳을 때까지 전업주부로 살다가 막내아들이 국민학교를 들어가던 해, 어린이 속셈학원을 차리고 원장 선생님으로 교사 경력을 다시 시작한다.


재이의 국민학교 시절 기억에는 80년 광주 민주화 항쟁, 87년 6월 항쟁과 같은 처절함과 치열함은 없다. 그 대신 가족의 어린이대공원 나들이, 86 서울 아시안게임, 88 서울 올림픽 경기대회의 마스코트 호돌이가 있다. 텔레비전을 켜면 나오던 가수 정수라의 대히트곡  <아! 대한민국>, 이승복 어린이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로 무장한 반공 교육,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와 두 번의 대한항공 폭파사건(1983년 대한항공 007편 격추사건,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을 기억한다. 대한민국은 가수 정수라의 <아! 대한만국>의 노랫말처럼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는' 나라이고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게임을 성공적으로 치러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나라지만,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는 공산 괴뢰 집단 '북한' 때문에 한 숨도 놓을 수 없는 살얼음판 위에 선 국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은 언제든지 전쟁에 대한 대비가 갖춰진 카리스마로 무장된 군인 출신이어야만 했고.


1985년, 케이의 자식 교육열은 가족을 서초동으로 이끌었다. 케이의 그런 노력과는 관계없이, 중고등학교 시절의 재이는 반 등수 중간을 맴도는, 공부보다는 노는데 온 마음을 다하는 학생이었다. 미국의 보이밴드 '뉴 키즈 온 더 블록'과 영국의 록밴드 '퀸', 한국의 '서태지와 아이들'과 '듀스'를 깊이 파고, 초사이어인 손오공과 슬램덩크의 채치수를 좋아했다.


재이가 기억하는 고3 시절, 1993년의 가장 큰 사건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의 개관. 그녀의 집에서 오페라하우스는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오페라하우스 개관 기념 축제로 <백조의 호수>, <카르멘>, <아이다>, <토스카> 등 발레와 오페라 공연예술작품을 만나게 되었고, 당시만 해도 '드레스 리허설'이 일반 관객에게도 열려있던 시절이라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캐스팅 <캣츠>, <아가씨와 건달들>을 공짜로 볼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아빠 회사의 파산. 와이는 동업자와 작은 수출회사를 경영했는데, 부도가 난 것이다. 케이는 원장 선생님이라는 직함을 내려놓고, 친구의 조언으로 와이와 함께 요식업계로 뛰어들었다. 재이가 대학에 들어가 경제학 세미나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김영삼 문민정부의 야심 찬 경제정책인 1993년 금융실명제와 1997년 IMF 외환위기 사이 어디쯤에 아빠의 회사 부도의 원인이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재이는 94학번이 되었다. 대학은 의례 가야 하는 곳이어서 갔고, 학과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커트라인에 맞춰 선택했다. 학과를 졸업한 이후, 전공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겠단 생각은 손톱만큼도 하지 못했던 시절. 와이의 사업 실패로 가정의 경제적 위기가 있었으나, 케이의 악착같은 생활력으로 그 여파가 재이네 삼 남매에게 심각하게 미치진 않았다. 와이와 케이의 헌신적 사랑과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으며 부족함 없이 자란 덕분일까? 재이에게는 커다란 갈망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처음 선택한 것이 대학의 동아리 활동이었다. 음악이 좋아, 뮤지컬이 좋아, 드럼을 배우고 싶어 선택한 음악 동아리인데, 그 동아리는 하필(혹은 운명적으로?) 운동권 동아리였다. 학교에 있는 음악 동아리가 그곳 딱 하나였으니,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노래패 활동을 통해 재이는 한국사회의 현대사와 경제사를 공부했고, 대중음악과 대중문화란 어떤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1997년 12월, <레미제라블>, <미스 사이공>, <지하철 1호선>과 같은 공연작품을 만드는 기획자가 되고 싶어, 노래패 선배가 일하고 있는 한국 음악인들을 위한 비영리조직에 막내로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재이가 받은 초봉은 30만 원이었다, 열정 페이 같은. 당시의 재이에게 돈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직장을 갖게 되었다는 점, 그 일이 무엇보다도 자신이 원하는 공연기획자가 되기 위한 첫걸음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1997년 12월부터 2009년 2월까지, 12년 간 재이는 쉬지 않고 일했으며, 대학원도 졸업하고, 티케이를 만나 결혼도 했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온 탓이었을까? 어느 순간 그녀는 '과연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었을까?'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 길을 잃었단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다, 요즘 말로 번-아웃! 쉼이 필요했다. 그 순간 남편 티케이는 "너하고 싶은 대로 해"라며 그녀를 격려했고, 덕분에 과감하게 백수가 되었다. 재이는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싶어 불교공부를 하고, 명상수련과 봉사활동에 많은 시간을 내었다. 가정 경제는 티케이가 책임졌고, 재이는 백수의 삶을 자유롭게 만끽했다. 친구들이 그녀에게 묻곤 했다. "넌 전생에 무슨 복을 지었길래, 그런 훌륭한 남편을 두었니?" 재이는 반 농담 삼아 이렇게 답하곤 했다, "그러게,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그간 쌓아 온 경력과 같은 분야에서 함께 성장해온 동료들 덕분에, 재이는 프리랜서로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용돈벌이 하듯 부담 없이 일했다.


그러던 중 2013년, 티케이로부터 쉼이 필요하다는 SOS가 날아왔다. 날씨 좋은 곳에서 한 1년 정도 지내다가 돌아오고 싶다고. 티케이 역시 대학 졸업 후 쉬지 않고 일했는데, 재이는 언제부터인지 남편이 좀비처럼 살고 있는 것 같아 내심 안타깝곤 했다. 그녀에게 쉼표가 필요했던 것처럼 티케이에게도 그런 순간이 온 것이다, 어찌 응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재이의 쿨한 승낙으로, 티케이는 휴직을 하고 일사천리로 계획을 세워 혼자 미국 샌디에고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정확하게 결혼생활 10년 차인 2013년, 한 해동안 재이와 티케이는 장거리 부부로 지냈다.


2021년의 재이는? 티케이가 샌디에고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만 해도 재이는 1년 후, 자신의 생활무대가 미국이 되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다. 그저 티케이가 오롯이 자신만의 1년을 잘 보내고 돌아오기만을 바랬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진실에 가까운 사실, 어디로 튈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 듯, 티케이와 함께 캘리포니아에서 살고 있다. 한국에서 부족함을 못 느끼며 살던 재이는, 그전까지는 겪어보지 못했던 다양한 상황에 부딪혀가며 좌충우돌하고 있다. 어쩌다 보니 역할의 역전? 티케이의 친구들은 가끔 그에게 묻는다, 넌 참 복도 많다... 어떻게 재이같이 생활력 만렙인 여자를 만난 거냐고.


재이는 그런 생각을 가끔 한다.

'아...! 나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는데, 이 남자는 전생에 우주를 구했구나....'


뭐, 잘 살고 있다는 얘기. 재이의 엄마, 케이처럼.

|Drawing by 염씨| 나는 잘 살고 있다. 나는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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