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라고 뭐, 운전이 다 비슷하지 않겠어?
너, 여기서 한국에서 하던 식으로 운전하면, 벌금 폭탄을 맞을 거야
미국에서 운전연수를 해 주던 남편이 나에게 겁을 주듯이 했던 말. 그런가...? 나는야 운전 경력 23년 차인 베테랑 드라이버. 한국에서 살던 시절엔 겁도 없이 스피드를 즐기기도 했다. 지역 출장을 다녀오면 고속도로 과속 딱지가 날아오곤 했으니까. VOLVO 못지않은 스피드를 자랑한다는 이유로 나의 애마, 황금빛 리오 Rio의 애칭은 '발보'였다. 10년 넘게 나와 발보는 마치 나라를 구하는 일을 하듯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미국이라고 뭐, 운전이 다 비슷하지 않겠어?
캘리포니아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핸드폰과 은행계좌를 개통하고, 운전면허증을 딴 것이다. 미국 생활에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동차를 꼽는다. 서울이야 대중교통이 워낙 잘 갖춰져 있어서 뚜벅이로 사는 것이 가능하지만, 이곳에서는 어림없는 일이다. 자가용으로 30분이면 닿을 거리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2시간이 넘게 걸리는 경우는 다반사이다. 물론 차가 없어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있지만, 움직임의 효율을 높이자면 차를 갖고 있는 것이 좋다. '움직임의 효율', 즉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는 돈과도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한데, 빠른 기동력은 생활 반경을 훨씬 크게 만들어준다. 운전대를 잡지 않는 날을 꼽기란, 글쎄... 없지 않을까?
엄청나게 세밀한 교통법규와 어마 무시한 벌금.
처음 차를 몰고 나왔을 때, 모든 것이 무서웠다.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 흰색 등 주정차를 할 수 있는 갓길(도로 경계석)도 이곳만의 색깔로 표시가 되어 있다. 빨간색 옆으로는 주차할 수 없다. 초록색은 제한된 시간에만 주차 가능을 의미한다. 흰색이나 노란색은 사람을 태우고 내리게 할 때만 정차 가능을 의미하며 주차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주차하기 전에 주차가 가능한 곳인지, 가능하다면 시간과 요일은 명시한 모든 표지판을 주의 깊게 읽어보아야 한다.
한 번은 친구네 아파트에 놀러 갔는데, 방문객 주차공간 visitor parking lot을 찾느라 텅텅 빈 주차공간을 두고 아파트 주변을 맴맴 돌던 기억도 선명하다. 소화전 옆에 차를 세워놨다가 부랴부랴 차를 옮긴 적도 있다. 견인될 수 있다는 표지판은 거리 곳곳에 붙어 있다.
인도 옆으로 차를 세워 놓을 때는 도로 경계석으로부터 30cm 이상 차를 떨어트려서 세우면 안 된다. 오르막이나 내리막길을 차를 세울 땐 앞바퀴의 방향을 틀어서 세워야 한다. 운전 중,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무조건 차를 세워야 한다. 스쿨버스가 빨간불을 깜빡이며 정차하고 있을 때는 같이 서야 한다. 스탑 싸인이 있는 교차로에서는 반드시 서서 3초를 센 후 지나가야 하며, 우회전을 할 경우에도 일단은 반드시 정지해야 한다.
서울에서는 보행자가 건널목이 아닌 곳에서 무단횡단을 할 수 없지만, 캘리포니아에서는 보행자들은 어떤 교차로이든 우선 통행권이 있다. 횡단보도는 페인트로 선이 그려져 있거나 없을 수도 있다. 보행자는 통행금지 표지판이 없는 한 횡단보도 표시가 없는 교차로에서도 법적으로 건널 수 있다. 보행자가 차도를 횡단하는데 자동차가 서지 않으면 운전자가 딱지(여기서는 딱지를 티켓이라고 한다)를 받는다. 차 밖으로 쓰레기를 버려도 벌금. 신호 위반, 속도위반, 주차 위반, 휴대폰 사용 등 모든 것이 벌금 폭탄으로 연결된다.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금액으로 최소 300불에서 1,000불도 거뜬히 넘는다. 벌금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교통위반학교에 가서 일정 시간 이상 수업을 이수해야 하며, 재판으로까지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벌금 폭탄과 시간이 함께 날아가는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끝나면 다행일 수도 있다. 만약 음주운전으로 걸리면, 바로 체포돼서 며칠 밤 유치장 신세를 지는 것은 기본이고, 영주권자의 경우엔 영주권을 박탈당하고 추방이 될 수도 있다고...
캘리포니아에서 최소 운전 나이는 만 16세이다. 고등학생들도 운전면허증이 있다면 차를 몰고 거리고 나올 수 있다. 여행객들도 캘리포니아에서는 자동차를 대여해서 직접 운전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속도 제한과 교통 법규는 엄격하게 적용된다.(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캘리포니아 교통국에서 발행한 운전자 가이드를 참고바람) 교통법규를 어겼을 때의 벌금 내역(2019년 기준)은 다음과 같다.
운전 면허증 없이 운전했을 때 $214
보험 없이 자동차 사고 시 운전면허 4년간 취소와 벌금 $796
빨간 신호등에서 멈추지 않았거나, 우회전 시 서지 않았을 때 $533
이중 노란색 선을 넘어갔을 때 $425
턴을 위반할 때 $284
과속 티켓 1-15마일 경우 $224 / 16-25마일 경우 $338
스탑 표지판에서 서지 않았을 때 $284
스쿨버스의 번쩍이는 전등을 통과할 때 $675
핸드폰 사용 시 처음 벌금 $76 / 두 번째 벌금(손에 들고 있어도 적용) $190
버스 정류장에 주차했을 때 $976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았을 때 $160
하이빔 라이트 켜고 주행 시 $382
어린이용 안전벨트를 차용하지 않았을 때 $436
헤드폰을 끼고 운전했을 때 $178
자동차 창문을 과하게 선팅 했을 때 $178
미국의 운전자들은 이렇게 길들여지는 듯하다. 처음엔 모든 것이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운전이라는 것이 엄밀하게는 사람의 목숨과 직결된 행동이기 때문에, 지금의 나는 강력한 교통법규와 벌금 체계를 찬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스피드로 질주하는 차들이나, 교통신호를 위반하고 스탑 싸인에서 서지 않는 차들이 곧잘 보인다. 그런 차들이 내 주변에 나타나면 나는 '엄청 부자인가 보군, 벌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가 봐.' 하며 슬그머니 피해 준다. 괜히 맞짱 떠봐야 손해밖에 남는 것이 없을 테니까. 어느새 나는 교통법규를 준수하는 모범 운전자가 되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재미난 일이 벌어졌다. 공식적으로 한 가구당 차량 2대를 파킹 할 수 있는 공간이 주어지는데, 지금까지는 꼭 지정된 곳에 주차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지정된 장소가 불편하기도 하고,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주민들이 비어있는 공간에 자기 편리대로 주차를 해왔다. 다만 늦은 밤에 들어오면 주차공간이 충분치 않아, 아파트 주변을 한두 바퀴 돌아야 한다는 아쉬움이 있긴 했다. 어느 날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익사이팅한 뉴스가 있다며, 주차시스템을 전폭적으로 개선하겠다는 이메일이 날아왔다. 그런데 그 메일이 한번 더 읽어보니 협박 내지는 경고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전폭적으로 개선한다는 것은 작은 것도 과장스럽게 포장하는 여기 사람들의 특유의 표현방식이었고, 결국 지정된 곳에 주차를 하지 않으면 견인차량을 부를 것이며, 그에 대한 모든 비용은 차주가 부담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메일은 2주간, 하루에 한 번씩, 스팸메일처럼 날아왔다.
We are going to start the parking program. The reserved parking spaces will be opening up for reservations. There will not be any warnings given to those who park in spaces that are not assigned to their unit. Towing will be enforced at all times unauthorized vehicles will be towed at Vehicle Owners expense.
나는 불편을 감수하고, 지정된 곳에 주차를 하기 시작했다. 어쩌겠는가, 견인조치를 하겠다고 하는데. 그날 이후, 나는 아파트 주차장 풍경에 그저 웃고 말았다. 항상 주차장을 꽉꽉 채우던 그 많은 차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우리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모범 주민들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