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별보다, 땅에 단단히 뿌리를 둔 올곧은 나무가 좋다.
음악으로 가득 찬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몇 달 동안 매주 월요일이면 귀호강을 했다. 꽤 훌쩍거리기도 했다. 알려지지 않은, 혹은 잊히거나 묻힌 가수들의 음악과 삶을 노래하는 <싱어게인, 무명가수전>(이하 싱어게인) 이야기다. 음악 경연의 형식을 띄고 있었지만, 나에게 <싱어게인>은 음악과 함께 사는 이들의 다큐멘터리였다.
'나는 이제 웃고 싶은 가수다'의 11호 가수님, '나는 정통 헤비메탈 가수다'의 29호 가수님, '나는 배 아픈 가수다'의 30호 가수님, '나는 오만함과 철없음으로 인해 어리석었던 가수다'의 45호 가수님, '나는 헬멧가왕 가수다'의 59호 가수님, '나는 노란 신호등 같은 가수다'의 63호 가수님을 포함한 모든 가수님들의 노래는 나의 눈과 귀, 마음을 설레게도, 아프게도 했다.
밀당보다는, 자신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음악인이 좋다
1라운드에서 심사위원 선미는 30호님의 <허니_박진영>를 본 후, "웬만하면 갈 뻔했다, 이 남자가 지금 나랑 밀당하는구나"라고 평한다. 장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30호 가수님은 "장르는 30호입니다"라고 답한다. 이 정도면... 누구나 한눈에 넘어갈만한 깡과 끼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29호님의 무대는 <그대는 어디에_임재범>이었다. 나는 임재범의 거친 듯 허스키한 창법을 좋아하진 않는데, 29호님의 무대는 달랐다. 단단하면서도 섬세함이 느껴지는 절제된 샤우팅, 인터뷰에서 느껴지는 차분한 목소리와 태도가 헤비메탈과 바로 연결되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명확하게 20여 년간 음악활동을 해온 '정통 헤비메탈 가수'라고 포지션 하는 29호님. 한눈에 뿅! 이후 나는 줄곧 29호님을 사랑하게 되었다.
젊음의 재기 발랄함보다는, 시간으로 다져진 단단함과 원숙함이 좋다
2라운드는 '30호님&63호님'의 <연극 속에서_신해철> vs '29호님&10호님'의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_빛과소금>이루어진 팀 대항전. 이미 SNS에서 스타가 된 30호님의 위트는 여기서도 빛난다. 심사위원 김종진의 썰렁한 개그 '장난의 운명'을 '말은 비뚤어지더라도 입은 똑바로 하라'는 멘트로 거들어주는 모습은, 역시... 누구나 한눈에 넘어갈만한 사람이군 싶었다.
대결 무대의 승자는 '30호님&63호님'의 새로운 해석과 재기 발랄함, 그러나 나의 마음을 붙잡은 음악은 시간으로 다져진 단단함과 원숙함의 '29호님&10호님'의 무대였다. 29호님은 이선희 심사위원의 슈퍼 어게인으로 살아남게 된다. 고마워요, 선희언니!
제발 숨 막혀 인형이 되긴, 제발 목말라 마음을 열어 사랑을 해줘
3라운드에서 30호님의 선곡은 <Chitty Chitty Bang Bang_이효리>, '장르가 30호'라는 그의 말대로, 처음 보는 듯한 느낌의 호불호가 크게 갈릴 수 있는 무대였다. 다소 날것의 느낌이 들긴 했지만, '나 이런 음악 해요, 어때요?'라며 청중들에게 조심스레 다가서는 듯했다.
29호님의 선곡은 <제발_들국화>, 20여 년을 묵묵히 헤비메탈 락커로서 한우물만 파온 그가 느껴졌다. 그는 절규하지 않지만, 한음 한음에 실린 그의 음악에 대한 묵직함이 나를 울렸다. 섬세하고, 음악에 대한 예의가 물씬 풍기는 목소리, 그런데 노래하는 그의 메시지가 강력하게 와서 꽂힌다. 이런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난다.
한 호흡으로 평생 한길을 가는 사람의 아름다움
4라운드에서 29호님은 <못다 핀 꽃 한 송이_김수철>을 선곡했다. 그의 선곡과 편곡은 3라운드 이후 매우 일관적이다. '정통 헤비메탈 락커'로서 평생 한길을 가고 있는 그의 삶과 노래가 군더더기 없이, 정직하게, 절제된 듯, 그러나 아주 크게 다가온다. 원작자인 김수철은 <못다 핀 꽃 한 송이>는 한 호흡으로 평생 한길을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돈이나 명예에 한눈을 팔지 않고 가겠다는 음악에 대한 의지를 담은 곡이라고 했다.
30호님의 무대는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_산울림>, 3라운드의 연장선에서 느낄 수 있는 30호님만의 창법이 이전 무대에 비해 한 층 가깝게 느껴졌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시도하고, 또 그만의 방식으로 정돈해 나가는, 그와 그의 음악은 계속적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 같다.
이승윤 님 멋져요, 정홍일 님 완전 사랑입니다.
5라운드, 드디어 이들의 본명이 공개되었다. 29호님은 가수 정홍일, 30호님은 가수 이승윤, 63호님은 가수 이무진, 11호님은 가수 소정이다. 정홍일은 <Maria '미녀는 괴로워 OST'_김아중>를 선곡, 대결 상대로 가수 유미를 지목하는데 그 이유가 "이번에 선곡한 곡이 유미 씨와 깊은 관련이 있는 곡이다, 고민 없이 유미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 분은 정말 <싱어게인>을 축제로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기기 위해 상대를 지목하는 것이 아닌, 이 사람과 함께 선다면 더욱 의미가 있는 무대가 될 것이라는 그의 태도에 다시 한번 감동했다. 각설하고 이번 무대의 압권은 '정홍일의 미소'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노래하는 예술가의 미소, 섹시하다.
이승윤은 <소우주_BTS>를 선곡, 아미로서는 아쉬움이 남는 무대였다. 물론 BTS 7명이 부르는 곡을 혼자서 당당하게 도전하는 그의 모습은 멋지다.
다 같이, 자유롭게 훨훨 날기를. 돈줄도 확 풀리기를
최종라운드, 헤비메탈 로커 정홍일다운, 정홍일만이 할 수 있는 노래로서 <해야_마그마>를 선곡했다. 록의 부흥을 꿈꾸는 정홍일은 자신의 뿌리가 고스란히 담긴 곡이라고 소개한다. 노래와 퍼포먼스 모두 백점 만점에 백점. 심사위원 송민호의 소감, 무대, 영상, 사운드 등 모든 것의 조화가 헐리우드 초대형 재난 블록버스터를 보는 느낌이었다고. 심사위원 규현의 소감에 나도 100% 공감, 이젠 돈줄이 확 풀렸으면 좋겠다. "헤비메탈 로커, 정홍일. 당신이 이미 드높이 솟은 해입니다."
이승윤의 마지막 곡은 <물_이적>. '방구석 음악인'이라 자칭하는 이승윤은 음악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고자 방문을 열었다고 한다. 자유롭게 훨훨 날기를.
<싱어게인>에서 1억의 상금을 거머쥔 자는 이승윤이었다. 예측 가능한 결과였다. 하지만 결과가 중요하진 않다. 모두가 음악으로 가득 찬, 현재를 살고 있는 멋진 가수들이었다.
심사위원 이선희, 유희열, 김종진, 김이나, 규현, 송민호, 선미, 이해리와 MC 이승기, 그리고 정홍일, 이승윤, 이무진, 소정. 모두 감사합니다. 2020년 12월과 2021년 1월의 월요일이 즐거웠습니다. 계속 음악을 통해 만나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