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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Dec 13. 2016

무대책 안나푸르나행

첫 판부터 왕 깨기!


저, 백수인데요.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날 꽤나 차갑게 봤나 보다. 술만 잡수시면 "뭔 일 하다 왔냐." "표정이 차갑다."며 팔짱 낀 내 모습을 흉내내기도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철벽녀가 된 것인가. 뭐, 자발적 백수가 되기 전까지 내 심신은 출전 불가능한 KO상태이긴 했다. 퇴사하고 부리나케 떠나 온 것은 맞았으니까. 사장님 말에 별 다른 구색이 떠오르지 않은 나는 멋쩍게 "목소리 탓이에요."라고 얼버무렸다.


하지만 2주간 안나푸르나를 다녀오고 난 변해있었다. 이런 낯 뜨거워지는 말도 들었다. 표정이 농익은 자두 같다나 뭐라나. 뭐,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나참, 사장님. 립 서비스할 거면 팍팍해주셔야지." 부끄러운 마음에 얼른 농담으로 되받아 쳤지만, 표정이 자연스러워졌다는 사장님 말을 내심 계속 곱씹었다. 이러나저러나 내가 달라진 것은 분명하니.


안나푸르나 산신령이
묘수라도 부린 건가?

그렇게 난 어느새 여유로운
여행자의 얼굴을 되찾았다.


포카라는 놀고먹기 딱 좋다. 히피스러운 액세서리를 좋아한다면, 늘 잔돈을 두둑이 챙기시라.


사실 나 같은 트레킹 초보자에게는 반 달씩이나 걸리는 라운드 트레킹을 추천하지도 않고, 가서도 안된다. 러닝 머신 좀 뛴다는 알량한 자부심으로 덤볐다간 골로 갈 수 있다. 정말이다.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날씨와 희박한 공기 때문에 건장한 남자도 종종 헬기에 실려 내려온다는 것이 바로 라운드 트레킹이다. 2주를 견딜 수 있을까? 더욱이 나는 대책 없이, 아무 준비도 없이 이곳에 왔는데...


준비성 제로인 나같은 사람을 위해, 포카라에서는 트레킹을 위한 모든 장비를 판다. 이 모든 것이 불과 우리 돈 11만원.


사장님은 거듭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코스에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 놈의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과 궁금증이 날 결국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래킹으로 이끈다. 백수의 패배감을 트레킹으로 극복해내리라! (이 호기로움으로 며칠 뒤 가혹한 교훈을 얻게 된다...) 가이드북에는 라운드 트레킹을 이렇게 묘사한다.

ABC코스가 미니 시리즈라면
라운드 트레킹은 대하드라마다.

아마 혼자였으면 절대 못 갔을 테지만, 운이 좋게도 든든한 두 친구를 만났다. 카트만두에서 만난 G 군과 포카라에서 만난 K 양과 함께 원정대를 꾸렸다. 나보다 한 살 어리지만 배려심 깊고 꼼꼼한 K 양이 덜렁이 우리 둘을 대신해 총무를 자처했고, 제대한 지 일 주 밖에 지나지 않은 G 군은 누나들의 머슴이 돼줬다. 우리는 그렇게 매일 6시면 눈을 떠서 저녁 8시까지 걷고, 먹고, 쉬고, 떠들었다. 내가 떠든 말 중에서도 아마 이 말이 가장 비중이지 않았을까 싶다.

왜 내 돈 내고
이 미친 짓을 시작했을까...

가이드 겸 포토를 겸해준 셰르파 친구들이 없었다면 애초에 이 산행은 불가능했다. 별 잡스러운 것들 들고가서 괜히 고생만 더 시켰다. 나란 사람, 욕망 덩어리여.


정말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몸도 나이도 불어난 것도 영향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긴 호흡의 운동을 안 한 탓이 컸다. 맨 앞에 가이드, 그 뒤를 K와 G가 따랐고, 나는 늘 저만치 끌려가듯 걷는 패턴이 이어졌다. 나를 격려하던 포터에게 먼저 가라 손짓하고, "저는 좀, 쉬어갈게요."하고 거의 매시간마다 주저앉았다.


내 덕에 G 군의 고생이 늘었다. 혈기 왕성한 G 군은 앞 뒤를 열심히 뛰어다니며 우리 사진 찍어주는데 여념 없었는데, 그러면서 내가 조금이라도 뒤쳐지면 짐을 대신 메고 내 등 뒤까지 밀어줬다. 얼마나 못난 누나인지... 아침마다 옷을 갈아입을 때면 잠시 자리 좀 비켜달라며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슬 아래 덜덜덜 떨게도 했으니, 이 또한 얼마나 못난 누나인지...


진정한 포터들. 도대체 왜 나는 내 몸 하나 제대로 못 끌고 가는가.


안나푸르나에서의 삶은 장대한 자연에 비해 소박했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볼을 붉게 밝히며 뛰어다녔고, 집집마다 신께 가정의 안녕을 비는 향을 피웠다. 소나무과 잎을 통에 넣고 불을 지펴 연기를 냈는데, 향기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30년 된 걸레 태우는 냄새랄까... 지천에는 동물들이 가득했다. 야크, 소, 염소, 양, 개 등등. 덕분에 평생 볼 똥은 다 본 것 같다. 습똥, 건똥, 따뜻똥의 냄새가 다 다르다는 사실을 아는가.


안나푸르나의 흔한 아침 풍경. 폰카로 찍은 것이 이 정도라면 상상이 가시는가.


이 땅의 어머니는 모두 훌륭하다. 안나푸르나에 보일러 한 대 놔드리고 싶다...


안나푸르나를 비롯해 모든 산이 다 그렇겠지만 하루 모든 계절이 다 공존하기에 낮에는 반팔 차림이어도 밤에는 보통 서너 겹씩 껴입고 잤다. 밤에는 그것도 모자라 침낭 두 개에 핫팩도 붙이고 뜨거운 물까지 껴안고 잤다. 서울에서는 분 단위로 바뀌는 뉴스피드를 보며 잘 와 닿지 않는 일에 일희일비하고 살았는데... 여기에서는 배부르고 따뜻하면 그만이었다.


지긋지긋한 세상 걱정은
이 산을 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삼시 세 끼' 예능은 애들 장난. 여기서의 불의 의미는 크다. 취사는 물론이고 난방을 도와준다. 아궁이 앞에서 양말 말리는 그 맛이란.


우리가 대체 한국 사람인 것 어떻게 알고 '브이'를 하는 거니. 티 없이 해맑은 안나푸르나의 꼬마들.


고산병 예방으로 가장 탁월한 것은 바로 씻지 않는 것! 하지만 타고난 반골 기질이 어김없이 출동했다. '내일부터 진짜 안 씻을 거니까 오늘까지만 씻겠다. 해 지기 전까지 말리면 괜찮을 것이다.'며 가이드의 말을 무시하고 고도 3300m에서 샤워를 한 게 화근이었다. 백두산은커녕 한라산도 안 올라봤으면서 어퍼 피상(Upper Pisang)에서 뜨거운 물을 버킷으로 50루피에 주고 사서 야금야금 샤워를 했는데, 결국 체온을 뺏겼나 보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결국 화를 불렀다.

 

찬 공기가 콧잔등을 시큰하게 자극하는 새벽의 풍경. 안개가 거치기 전 동네 모습은 늘 신비롭다.


숨쉬기가 버겁다.
큰 풍선에 들어앉아
숨 쉬는 기분이랄까.

고산병이 시작되면 일단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거기에 몸살이 난 것처럼 몸이 축축 처지고 무기력해진다. 또 고산병에 걸리면 산소가 뇌에 공급이 안돼서 꿈을 많이 꾸게 되는데, 정말 하루 만에 초, 중, 고 시절 꿈을 종류별대로 꾼듯하다.


사실 트레킹 둘째 날부터 헛것을 봤다. 지금도 인상착의까지 모두 기억나지만 저질 몸이 만들어낸 신기루라 믿으리라. 당시 주변 분위기로는 난 귀신 보는 여인네였다. 띠망(Timang) 가는 길에 분홍색 바람막이 점퍼를 입은 백인 여성을 보고선 "방금 내려온 그 여자애 언제 내려갔어?" 애들에게 물었는데, 그 말 직후 내가 정상이 아님을 주변 표정을 보고 알아차렸다. 내 눈에만 보였던 것이다.


'너는 산이고, 나는 그저 아프다.' 고산병이 시작되고,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금강산도 식후경, 아니 건강이 최고...


밥도 포기하고 하루 이틀을 꼬박 누워 있었다. 죽부인처럼 늘 껴안고 있었던 보온 통 물이 찬물이 되어도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로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었다. 손발이 저리고, 어질어질했다. 역시 착한 동생들... 고맙게도 내 건강부터 챙겨줬다. 레몬 생강차를 타다 줬고, 수프를 먹여줬다. 이러려고 언니, 누나 자청했나 자괴감이 들었다.


정말 고산병이 절정일 땐 너무 괴로워서 비행기 타고 내려갈까 고민했지만, 어떻게 온 곳인데 이렇게 질 수 없었다. 셰르파 친구들의 말대로 매시간마다 일어나 따뜻한 물을 마시고 허리가 끊어지도록 자고 또 잤다. 구토를 하면 내려가야 한다고 해서 사실 억지로 구역질도 참았다. 위험한 짓이다.


그러고 한 이틀이 지났을까? 기적처럼 푹 자고 일어나니, 그 뒤론 예방접종 맞은 것처럼 고산증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무엇이 회복에 결정타를 발휘했는지는 모른다. 어김없이 이번에도 내 몸은 잘 적응해주었다.


이런 휴대전화 알람은 처음 봤다.


그림 같은 안나푸르나 트레킹 숙소들의 하루 숙박비는 얼마일까? 놀랍게도 단돈 1,000원이다. 요즘 PC방 1시간 이용료도 1,000원이 넘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돈을 버는가? 바로 음식값에서 충당한다. 토롱 라(Thorong La), 그러니까 우리의 목적지 5,416m 직전까지의 모든 숙소의 숙박비는 거의 다 두당 1,000원이다.


2~3시 쯤 산행을 끝내고 호텔에 앉아 신선 놀음하기.


맹물도 꿀맛일 수밖에 없는, 안나푸르나의 찻집들.


다만 올라갈수록 음식값이 계속 뛴다. 1,500원 정도 했던 달걀이 올라갈수록 점점 뛰더니 나중에는 3,000원 정도로 뛴다. 그래도 보통 한 끼를 해결하는데 5,000원이면 되니까 많이 써야 하루에 2만 원 정도였다. 셰르파 친구들에게 하루에 지불하는 돈이 15불 정도니 평균 35,000원에서 40,000원 정도면 짐도, 잠도, 먹을 것도 해결된다는 것. 그 대가로 하루동일 360도 파노라마 달력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노을 무렵엔 선홍빛 산들을,
밤이면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을 보며
마냥 여기 존재함에 감사했다.


먹었던 것 중 가장 호화로웠던 음식 야크 스테이크. 질기긴 해도 언제 야크를 맛보겠느냐. 맛을 결정 짓는 것은 고기가 아니라 야크 치즈다.
이보다 간지 폭풍 휘몰아치는 기념품 숍 있으며 나와 봐라.


한 달 전 39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토롱라의 언덕은 의외로 평안했다.


물론 난 새벽 3시 반부터 시작된 산행에 녹초가 돼있었지만 토롱라는 절대 눈사태가 날 만큼 험해 보이지 않았다. 가이드에게 사정을 물어보니 당시 사고는 눈사태 때문이 아니라 눈보라 때문이었단다. 이례적으로 10월 중순에 불어닥친 사이클론에 이상 기온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눈보라가 일면서 수 십 명의 사람이 눈 속에 발이 묶기에 된 거란다.


누군가는 죽을힘을 다해 정상에 있는 찻집으로 뛰어갔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침낭을 꺼냈다. 운이 좋았던 전자의 200여 명의 사람들은 10평도 안 되는 찻집에서 꾸기고 꾸겨 들어가 24시간을 견뎌내 전부 살았고, 후자는 대부분 세상을 떴다. 시간상으로는 오전 10시 이전에 토롱라에 오른 사람은 모두 살았고, 그 이후에 오른 사람은 대부분 목숨을 잃은 것이 됐단다.


2014년 가을, 갑작스런 기상이변으로 39명이 목숨을 잃은 그 곳. 인간은 자연을 이길 수 없음을 다시금 느꼈다.


묵디나트에서 본 백발의 백인 할머니의 생일파티가 가장 강렬하게 기억된다. 내가 넘기에도 버거웠던 그 높은 산을 예순이 넘어 보이는 어르신 네 분이 해냈는데 그들에겐 해냈다는 성취감보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지금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며 행복해하는 듯했다.


그러던 중 한 일행이 생일을 맞았고 비밀리에 생일파티를 준비한 모양이다. 각국에서 온 트레커들의 박수와 함께 묵디나트 호스텔에는 한 사람만을 위한 생일 축하 노래가 울렸다. 네팔 케이크가 당연히 맛있을 리 없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행복이 그렁거렸다.


무엇보다 사람이더라. 같이 추억할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다시 내려올 산, 뭣하러 올라가냐?
거기에도 우리가 모르는
삶이 있더라고요.
반가웠다. 안나푸르나!

이 글은 2014년 11월에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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