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고양이는 꽤 다르다. 주인의 기척만 들려도 개는 헐레벌떡 달려들지만 고양이는 슬쩍 돌아보는 게 전부다. 그들의 속내를 사람처럼 묘사한 이야기도 재미있다. 주인이 잘해 주면 개는 '아, 주인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는데, 고양이는 '아, 내가 이렇게 잘난 존재구나'라고 여긴단다.
진짜로 개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아느냐, 고양이에게 물어봤느냐고 딴지를 걸어 본들이다. 당연히 인간은 알 수 없다. 뇌파 측정? 그냥 지그재그다. 중요한 건 그들 속마음의 진위가 아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의 느낌이다. 혹시 나는 고양이와 같지 았았나? 나 잘난 맛에 주위의 고마움을 놓쳤던 건 아니었을까?
물론 참거짓의 세계가 있다. 범죄자를 색출하거나 우주선의 궤적을 밝히려면 칼같은 논증이 필요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보다 넓다. 모든 걸 흑백으로 처리하면 초여름 들국화의 노오란 잎새도, 저녁놀 묻은 바알간 얼굴도 매만질 수 없다. 소설인 줄 뻔히 알면서도 읽다가 울지 않았던가. 그래도 '속았다'고 여긴 적은 없었다.
참거짓의 프레임으로 접근하면 많은 것을 놓칠 수 있다. 종교도 그렇다. 창세기를 들이밀며 우주가 정말 엿새만에 만들어졌다고 언성을 높이는 쪽이나, 천문학의 데이터를 내세워 그걸 일일히 반박하는 쪽이나 개와 고양이의 뇌를 까뒤집는 셈이다. 이쪽과 저쪽 너머에 창조주의 시선과 섭리의 세계가 있다.
나는 필요 이상 참거짓에 갇혀 살았다. 세상에는 참거짓이 필요한 영역, 그 안에 담기지 않는 영역이 공존한다. 정말로 개가 주인의 사랑에 감사하는지보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내가 주변을 감사히 볼 수 있다면 족하다. '개소리'가 아니라 '내소리'가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