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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ug 07. 2024

컨티넨탈 일리노이 은행 구제 사건

저축대부조합 파산 사건 05

모럴해저드의 대표적 사례가 레이건 대통령 시대인 1984년 5월에 발생된 '컨티넨탈 일리노이 은행(Continental Illinois Bank)' 구제 사건이었다.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 위치한 컨티넨탈 일리노이 은행 <출처 : 위키피디아>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일리노이 은행


이 은행은 1910년에 두 개의 은행이 합병하면서 예치금 1억 7,500만 달러로 설립되었는데, 한때 400억 달러의 예금을 보유하면서 전 세계 60여 개의 지점과 시카고 지역 내 약 8,000명이 넘는 직원을 고용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미국 내 순위 7위를 달리던 대규모 은행이었다.


별 탈 없이 운영되던 이 은행은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 석유와 가스의 가격 상승으로 지역 내 유전 개발과 가스 시설 투자가 증가하면서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당시 에너지 개발에 주력했던 오클라호마 주 깃발 <출처 : 위키피디아>



새로이 이사회 의장에 취임한 신임 회장이 몇 년 안에 미국 내 최고 은행의 반열올라야 한다는 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이런 배경에는 레이건 시대에 들어 진행된 금융권의 대규모 규제 완화가 깔려 있었다.


정부의 구제 완화와 경영진의 탐욕이 만나면서


보수적 관리 중심의 영업전략이 하루아침에 공격적 담보 대출 전략으로 변경되면서 지급 여력과 담보가 부족한 중소형 규모의 기업에게 까지 대출이 폭증했다.


사실상 관리체계를 갖추기도 전에 위험성을 안고 은행의 영업을 확대한 것이다.


이제 막 뜨기 시작하는 오클라호마 유전사업 개발에 막대한 돈이 대출되었는데, 부동산 담보의 안전장치보다는 이자와 대출수수료에 관심이 더 높았다.


여기에는 직원들의 탐욕도 한 몫했다.



은행의 본부가 있던 시카고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대표적인 이가 석유 대출 사업부의 임원인 존 레이틀((John Lytle)이었다.


탐욕의 시작과 횡행한 실무진의 뇌물 받기


그는 230만 달러 규모의 위험한 대출을 앞장서서 주선하고 이를 주도해 나갔다. 서류상의 증빙 자료도 본인이 직접 챙기고 승인받았는데, 사살상 실적 중심의 영진 분위기가 이를 묵인해 주었다.


하지만 속사정은 달랐다. 나중에 그가 대출받은 회사로부터 58만 달러의 뇌물을 받은 것으로 판명되어 결국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도 또 다른 임원들은 리스크 높은 대출 건에 대한 담보 실사도 제대로 진행하지 않았다.



뇌물은 대형회사도 단번에 무너뜨린다 <출처 : 위키피디아>



점차 은행 간부의 뒷주머니 챙기기가 성행했고 부실 리스크를 점검해야 한다는 부사장의 강력한 의견도 묵살되었다. 오직 목표 달성에 매진하는 것이 경영진이 가진 유일한 전략이었다.


은행의 부실과 뱅크런의 발생


이 은행은 일순간에 닥친 부동산 가격의 하락과 원자재 가격의 폭락으로 기업들이 부실해지면서 원금과 이자의 연체가 늘어나자 바로 위기를 맞았다. 대출 부실화가 계속 심각해지면서 결국 추락하게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1984년 5월 초에 100억 달러 이상의 예금이 인출되기도 했다.


문제는 이런 부실한 은행을 파산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레이건 정부는 이 은행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은행의 구제는 새로운 문제점을 파생시켰다. 바로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라는 단어였다.

 


도덕적 해이는 부도덕한 행위를 뜻한다 <출처 : 위키피디아>



은행의 부실은 은행이 책임을 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연관된 금융시스템 전반의 위험성을 피하고자 장부가 지원해  것이다. 결국은 은행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는 면죄부를 안겨준 꼴이었다.


도적적 해이에 따른 경제적 손실과 연방정부의 구제


이후 이런 모습을 지켜본 다른 은행들은 '대마불사(Too Big to Fail)'란 단어를 실감했다. 결과적으로 규모가 큰 은행이 부실해지면 연방정부가 구해줄 것이란 보이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심리는 은행계 전반에 퍼지게 되었고 안정적인 대출과 여신 관리에 집중하기보다는, 위험하지만 수익이 많이 나고 이익을 더 챙겨갈 수 있는 고위험 상품에 투자하는 효과를 불러왔다.


결국 위험성이 높은 하이일드 채권인 정크본드에까지 손을 대게 되었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일리노이 은행은 사실상 1984년에  파산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레이건 정부에 의해 살려내는 것으로 최종 결정이 났다.

 


레이건 대통령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결국 덩치가 큰 은행에서 문제가 생기자 정부의 개입이 시작된 것이다.


한계에 닥친 은행의 파산


원칙적으로 연방정부의 자금을 직접 투입하면 안 되었기에 연준과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이용해 법을 우회한 변칙적인 방법으로 금융 구제를 지원했다.


16개의 주요 은행이 45억 달러의 신용 한도를 준비해 놓았고, 연방예금보험공사는 15억 달러의 자본을 투입했으며, 연준(Fed)은 별도로 요청받은 유동성 요구 충족을 들어주었다.


그래도 힘들게 운영되던 이 은행은 1994년에 부실을 견디지 못하고 파산 한 뒤, 연방예금보험공사(Federal Deposit Insurance Corp, FDIC)에 강제 압수되었다가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America Corp)에 매각되면서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뱅크오브아메리카 <출처 : 위키피디아>


미국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대형 은행 파산 사건


이 은행의 파산은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행정부 시대에 잉태된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은행 파산이었다.


1984년에 구제를 하지 않았으면, 정부의 세금 투입 규모가 더 줄어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거대 은행의 파산 기록은 2008년 금융위기 때 '워싱턴 뮤추얼 은행(Washington Mutual)'의 대규모 파산에 의해 깨질 때까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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